2002년 11월 당시 무명의 러시아 수학자였던 그리고리 페렐만(Perelman)은 지난 100년간 전 세계 수학계의 난제(難題)였던 '푸앵카레 추측(Poincar�[conjecture)'을 푸는 데 성공했다. 푸앵카레 추측은 1904년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제기한 위상 기하학 문제로, 우주의 형태와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방 수학자들은 옛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을 때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서방의 수학계는 페렐만의 풀이법을 이해하고 검증하는 데만 꼬박 3년이 걸렸다.

국제수학자연맹(IMU)은 2006년 뒤늦게 페렐만을 수학 분야의 노벨상 격인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했지만, 페렐만은 수상을 거부했다. 상금 100만달러와 유명 대학들의 교수직 제의도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한다.

(사진 왼쪽)그리고리 페렐만(Perelman), '완벽한 계산: 한 천재와 세기의 수학적 발견'(사진 오른쪽).

러시아는 어떻게 이런 세기적인 천재 수학자를 배출할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 러시아의 언론인 마사 게센(Gessen)은 10일 출간된 저서 '완벽한 계산: 한 천재와 세기의 수학적 발견'에서 "수학은 스탈린이 숨겨둔 옛 소련의 최대 비밀무기였다"고 주장했다.

1941년 나치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한 지 3주 만에 소련의 공군력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스탈린은 민간 항공기를 폭격기로 개조해 공군력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민항기의 속도가 너무 느려, 타깃 폭격에 소요되는 시간을 예측·통제할 수가 없었다. 당시 안드레이 콜모고로프 등 소련의 수학자들이 소련군의 모든 폭격과 포격 계산 시스템을 새로 짜, 스탈린의 고민을 해결해줬다. 이후 스탈린은 수학자를 우대하는 동시에, 극비(極��)인력으로 관리했다.

수학자들에게는 안정된 직장과 급여, 아파트·차량·식료품 등이 제공됐다. 대신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게 했다. 외국인과 접촉하면 간첩죄로 처벌했다. 스탈린 사후(死後)에도, 수학자들은 여전히 생계와 이데올로기·인간관계·강의·논문에 대한 부담 없이 수학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런 수학자들이 소련 40여개 도시에 흩어진 비밀 군사연구소 등에서 근 100만명 배출됐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수학자들에 대한 지원도 끊겼다. 이후 많은 러시아 수학자들이 미국 등 서방 국가로 이주했다. 페렐만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갔지만, 곧 단기 실적을 강조하는 미국 대학들의 연구 풍토에 실망해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후 7년간 두문불출하면서, 푸앵카레 추측 연구에만 몰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