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이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 동전은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던 기자가 사용할 취재경비였다. 던은 한국 화폐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일본인 통역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다. 저녁 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 더미를 보고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했다(콜리어스, 1904.6.4.).

정부의 화폐정책 부재로 동전 가치는 갈수록 추락했다. 나라의 앞날은 생각지 않고 '동전과 백동전을 과다히 만들어 세상에 펴놓으매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 때는 은전을 받고 살 때는 동전을 주며, 대한 사람들도 점점 은전을 거두어 혹 감추며 일시 이익을 도모하니 세상에 남는 것은 추한 당오전(當五錢)과 무거운 동전뿐'이었다(독립신문, 1899.2.3.). 당오전은 거두어들이고 동전을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

화폐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우리의 화폐는 외국화폐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했다. '어느 나라든지 위에는 정부가 있고 아래는 백성이 있으면 그 사이에 재정이 융성하고 관통하여 조금도 고하가 없어야 물가도 경중이 없을뿐더러 정부와 백성 사이에 의심이 없어 합심이 되는 법이거늘 대한에서는 자주독립국으로서 내 나라 돈을 쓰지 못하고 타국 것을 차용하다가 오늘날 이 폐단이 생겨났으니 과연 가석하도다. 정부는 어찌하여 내 백성으로 하여금 이웃나라의 돈을 쓰게 하다가 필경은 저 지경이 되었는고'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독립신문, 1899.9.22.)

'화폐는 국가의 혈맥이오 인민의 양식이어늘 한국은 원래 화폐의 제도가 발달치 못하다가 십여년 내로는 금융기관이 전혀 외국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서 엽전과 은전 동전과 외국 화폐 등 각종을 금년에 통용하다가 내년에 금지하고 금일에 행용(行用)하다가 도로 거두며…' (대한매일신보, 1909.4.7.).

1905년 7월 1일부터 탁지부는 화폐 정리사업에 착수했다. 1908년 1월 탁지부령으로 그 해 12월 말까지 구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신화폐의 유통을 권장했다. 그러나 화폐주권의 상실로 경제권은 일본에 종속되고 종로 상인들 사이에 전황(錢荒)이 일어나 경제계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점포를 닫고 도망가거나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비참한 일도 벌어졌다. 나라가 재정운용에 실패해 경제가 파탄나면 국민의 고통이 크다는 교훈이었다.

갈길이 바빴던 던은 이 돈더미를 튼튼하고 정직해 보이는 장정들이 지키도록 한 뒤 일본 군대를 따라 북으로 떠났는데 2주일 뒤 돌아와 보니 돈은 그대로 있었지만, 품삯을 지불하자 돈더미는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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