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논설위원

이번에는 "혹시" 했던 국제사회의 북핵 대응이 "역시"로 가고 있다. 중국이 북핵 폐기를 위해 북한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 명확한 이상 북한이 궁지에 몰려 핵을 버릴 것이란 희망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일괄 타결 구상이나 미국의 포괄적 타결 구상은 아직은 먼 일로만 느껴진다. 그러나 북핵 폐기는 어떤 경우든 북한이 항복하는 형식이 아니라 한반도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꿀 대타결의 상황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이 경제 지원 정도를 받고 생명과도 같은 핵을 포기할 것으로 본다면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다. 이 대타결 국면에서 우리는 매우 곤란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정치·군사적 문제와 맞닥뜨려야 한다.

김정일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북·미 회담 결과에 따라 6자회담에 복귀할 뜻을 밝히면서 "북·미 간 적대관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핵 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을 분명히 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했다. 노동신문은 북핵 문제 해결의 기본 원칙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라면서 미·북 간 평화협정을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방도의 하나"라고 했다.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미·북 간 평화협정 체결은 한·미 동맹을 종료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것이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1월과 2월 평양을 방문했던 미국의 전직 관료와 북한문제 전문가들에게 '과감한 딜'을 하자면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의 종료,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거와 한·미 동맹을 끝내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북한이 말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의 종료가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한다는 것은 우리 당국자들도 언급하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18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최근 한반도 주변 정세와 북핵 문제 전망' 간담회에서 "북한의 핵무기는 남한을 겨냥한 것"이라며 "북한이 얘기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는 미·북 평화협정과 그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라고 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북한이 한·미가 받을 리 없는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핵 포기를 거부하기 위해 내놓는 핑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미국이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북핵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리라는 보장도 없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 정부가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은 없다. 겉으로 내놓는 미국의 공식 입장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이 북핵 제거와 주한미군 주둔 중 어느 것이 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를 한번쯤 비교해 보게 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국이 주한미군 없이도 한반도 전쟁 억지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면 북핵과 주한미군을 교환하는 거래는 가상의 차원에서 현실의 문제로 대두할 수도 있다. 미군 전력이 점차 해·공군 위주로 바뀌고 있고 주일미군과 괌 기지가 있는 상황에서 반드시 한국에 지상 기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어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미국에서 "북핵 문제는 상호 적대적인 입장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로버트 칼린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담당관)는 식의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그냥 흘려 들을 것만은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주한미군 철수를 무조건 환영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결국은 주한미군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는 판단으로 기울 것이다. 일본도 북핵보다는 주한미군 철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최악의 경우 이 문제에서 한국만 홀로 남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 입장에서 북핵 제거보다는 전쟁 억지가 더 눈 앞의 국익이다.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북핵과 주한미군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꺼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가 대북 협상에서 언제까지나 우리의 급소이자 근본적 약점이 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주한미군이 없으면 전쟁 불안이 일고 북핵이 없어지지 않으면 핵공포 속에 통일은 불가능해진다. 이 딜레마는 우리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은 6자회담의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2·13 합의에 모두 명문화돼 있다.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닥치기 전에 어디에선가는 통일 상황까지를 염두에 둔 장기적 전략 검토와 대응 준비가 이뤄지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