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yle="cursor:pointer;" onclick="window.open('http://books.chosun.com/novel/lmy/popup.html','se','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no,menubar=no,scrollbars=no,resizable=no,copyhistory=no,width=1100,height=710,top=0');"><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tn_view.gif" border="0" align="absmiddle"><

흑룡강(黑龍江)의 물결은 반년 전 안중근이 의형제인 엄인섭 김기룡과 함께 바라보던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희끗희끗 떠다니던 해빙기의 얼음조각은 보이지 않았으나 머지않은 결빙을 앞둔 검푸른 물결은 지난봄 알지 못할 감동으로 바라보았던 그 물결이었다. 그러나 기선 갑판에 나와선 안중근은 그때의 그 안중근이 아니었다.

지난봄 의병 모병과 군자금 조달을 위해 유세를 나설 때만 해도 안중근은 새로 출발하는 자의 열정과 패기에 차 있었다. 하지만 같은 목적으로 흑룡강을 오르내리고 있어도 지금의 안중근은 달랐다. 허망한 패퇴와 가혹한 생존의 체험은 안중근을 다시 10년은 더 늙어버린 듯한 느낌에 젖게 했다. 늙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려 깊고 신중해졌다는 뜻도 되지만 또한 그만큼 쇠잔하고 허무감에 친숙해졌다는 뜻도 된다.

일러스트 김지혁

함께 하는 사람도 달라졌다. 그때는 당찬 엄인섭과 우직하게 몰아붙이는 김기룡이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어린 황영길과 어렵게 달래 데려온 감택형이란 떠돌이가 있을 뿐이었다. 안중근이 회령에서 일본군을 놓아준 일로 엄인섭은 아직도 의절(義絶) 상태였고, 김기룡은 안중근과의 우의는 회복했으나 몸져누워 데려올 수 없었다.

거기다가 패퇴의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상세하게 동포들의 마을에 전해져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놓았다. 겨우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추풍(秋風)이나 수분하(綏分河)같이 연추에서 가까운 지역은 말할 것 없고, 멀리 하발포(河發浦:하바롭스크) 인근의 동포들까지도 몇 명이 국내로 진공하였으며, 얼마나 어이없이 패퇴하였고, 또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해외에서 조직된 의병의 첫 진공전이란 점에서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기들의 성의와 염원이 그렇게 허망하게 꺾인 것에 많은 한인은 총을 들고 나가 싸운 사람들 못지않은 상처를 받은 듯하였다.

그렇다 보니 안중근의 그 유세(遊說) 길은 전 같을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패퇴를 겪은 비장감까지 곁들여 독립특파부대로 싸울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빌었지만 모이는 것은 지난번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그래도 연추에서 멀어질수록, 그리고 전번에 가본 적이 없는 마을일수록 호응이 나아지는 것이 힘이 되어 그 여행을 이어가게 했다. 하발포에서 다시 기선을 타고 흑룡강을 오르내리며 물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을 연 한인들을 찾아보게 된 일이 그랬다.

"안 선생님. 바람이 찹니다. 이제 선창으로 내려가지요."

누가 갑판 난간을 잡고 선 안중근의 등 뒤에서 그렇게 말했다. 나이가 어린데다 키가 작아 꼬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황영길이었다. 미욱한 데가 있는 감택형은 선창 안에서 낮잠이라도 자는 모양이었다.

"그럴 거 없네. 여기 신한촌(新韓村)이 다돼 갈 걸세. 감 동지에게 가서 내릴 채비나 하라 이르게."

안중근이 그렇게 이르자 황영길도 배를 탈 때 들은 말이 기억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세 시간쯤 지난 듯하네요."

그리고는 한참만에 눈이 부숭부숭한 감택형을 데려왔다. 세 사람이 내린 곳은 흑룡강 남안의 작은 계곡 어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한인 오십여 호(戶)가 마을을 이루어 채소와 근채류(根菜類)를 재배해 하발포 시장에 내다 파는 일종의 근교농업을 하며 사는데, 작은 교회까지 있는 게 의식이 풍부하고 안정된 마을 같았다. 안중근은 처음 와보는 마을이었다.

마을로 들어간 안중근은 먼저 촌장 격인 마을 어른을 찾아보고 자신이 온 까닭을 밝힌 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주기를 청했다. 다행히도 마을의 교회는 천주교 공소였고, 촌장격인 유 아무개란 노인도 천주교 신도였다. 거기다가 어렴풋하게나마 안중근의 이름도 들어본 사람인 듯 따뜻이 맞아주었다.

[추천! 오늘 읽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