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는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이 무대에서 독무(獨舞)를 할 수 있고 박수를 받을 수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발레 전공 교수로 특채된 발레리노 김용걸(36)씨가 디지틀조선일보의 케이블 채널인 비즈니스앤(Business&)의 '강인선라이브'에 출연해 한 이야기다.

김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들 넷 중 한명은 발레를 시키고 싶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설득에 마지못해 발레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산예고 입학 후 발레의 매력에 눈을 떠 지독한 연습벌레가 됐다. 성균관대 무용과 졸업 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고 곧 수석 무용수가 됐다. 1997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동상을 차지하고 98년 파리 국제무용콩쿠르에서는 김지영씨와 짝을 이뤄 듀엣 부문 1위에 올랐다.

발레리노 김용걸씨는 부상을 당해 연습을 못하게 되면 밥 먹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연습벌레다. 강인선라이브에 출연한 김씨는 환상적인 무대 뒤에서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하는 발레리노의 삶이 어떤 것인지 들려준다.

그 직후 김씨는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자리를 버리고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자신감, 외국의 발레 현장에 대한 궁금증,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마음 속에서 꿈틀대다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 돼서 떠났다"고 했다. 파리는 냉혹하고 철저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는 서울을 떠난 걸 매일 후회했다. 그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국제대회 입상자라 해도 견습생을 거쳐야만 단원으로 받아준다. 그러나 너무나 하고 싶었기 때문에 뼈에 금이 가고 근육이 파열돼도 참아냈다"고 했다. 그래도 부상을 당해 연습을 중단했을 땐 처절할 정도로 초라했다. 그는 "한국서 큰소리치고 떠났는데 살이 쪄서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니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서 밖에도 못 나갔다"고 했다.

2000년 50 대 1의 경쟁을 뚫고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정단원이 됐을 때 그는 "센강변을 걷다가 그동안 고생한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당시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2006년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을 땐 믿기질 않아서 몇번을 다시 물어 확인하고도 멍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가 세계 정상급 발레리노로 성장하기까지 최고의 스승은 아버지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출근하는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성실함 그 자체인 아버지를 보며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는 "하루 0.01%만이라도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꾸준히 해나가다보면 10~20년이면 뭔가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발레라는 지루한 작업을 하는 데는 "성실성이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언젠가는 발레를 하며 느낀 행복과 갈등을 춤으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건 2000년 이후 우리나라에도 발레 마니아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점이다. 그는 "아낌없이 투자해서 공연 보러 오고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교육자로서의 삶을 생각한 건 파리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였다. 그는 "부상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뒤로 물러서서 전체를 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해줬다"고 했다. 그에겐 가장 아끼는 작품이나 배역이 없다. "어떤 작품이든 다시는 이 작품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죽을 각오로 연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