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문화부 차장

김지하 시인이 8일 스웨덴 스톡홀름대학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문학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촛불, 횃불, 숯불'이란 제목으로 강연한다. 한국과 스웨덴 수교 50주년을 맞아 스톡홀름대학의 한국학과 주최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이 모이는 자리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시인에게 한가위 다음 날 전화를 걸었더니 "한국 민요와 불교 전설, 촛불, 개벽의 관계를 설명하고 촛불이라는 한국의 현상에 대해 얘기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그는 "순수한 촛불은 우주적 사건"이라면서도 "이른바 운동권이 촛불을 자기들 고기 구워먹는 숯불로, 남의 집 터는 화적떼 횃불로 악용했다"고 비판해왔다. 스웨덴에 처음 간다는 그는 "내가 운동권을 비판했더니 운동권의 아우들이 '형님, 무정합니다'라고 서운해하지만, 동아시아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이 다가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응해 진취적 입장을 세우려면 기존의 좌우파 '철밥통' 싸움을 그만 해야 한다"며 사고의 전환을 강조했다.

김 시인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 '천만원짜리 개망신'을 통해 '자기들 자신이 대권 후보로까지 밀었던 사람을 천만원으로 잡아먹겠다고 벼르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해 또 논란을 일으켰다. "통쾌하다"와 "미쳤다"는 반응으로 나뉜다. 그 중간에 선 입장도 있다. 김 시인의 정운찬 옹호론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 편애'를 날것 그대로 표현했다는 엄정한 비판도 적지 않다. 사실 지난 몇년 사이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문단에서도 김 시인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럴수록 김 시인은 독한 언어로 반발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김 시인은 이념뿐만 아니라 미학·종교·고대사·생명과학 등 거의 전 영역에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사상가처럼 군림하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유폐를 자처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한때 민중문학의 기수였던 김지하의 '자칭 진보주의자'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그는 1970년대 독방에 수감됐을 때부터 운동권 과격파를 혐오했다. 지난여름 사석에서 만난 그는 북한 권력 서열 22위의 거물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거명했다. "이선실이 평양에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고 한 뒤 우리 운동권 선후배들을 돈으로 포섭했다"는 고발성 발언이었다. "그들은 당시 독방에 있던 나보고 자꾸 반정부 성명서를 발표해 정부의 탄압을 유발하라는 거야. 내가 옥사하기를 바란 것이지. 7년 동안 독방에 처박힌 내가 왜 그들을 위해 순교를 해야 해?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그들은 아내를 납치해서 살해하려고까지 했어. 어떤 놈은 장모(소설가 박경리)가 내 석방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안 한다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어."

거센 어조로 당시를 떠올릴 때 그의 짙은 눈썹이 묵은 분노를 표출했다. '정치적 순교'를 거부했던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명사상에 눈을 떴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던 것이고, 촛불 집회의 폭력시위대를 '까쇠'라고 욕하고, 노무현 정부 시절 '수백억 나랏돈 쓴 자칭 민주화 운동가들'을 향해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욕이 성행했던 르네상스 시대와 비슷한 징후를 보여준다"면서 "시커먼 기운 속에서 흰빛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나면, 어둠과 빛이 절충된 '흰 그늘'의 미학이 나올 것"이라고 욕설의 미학을 내세웠다.

김 시인은 최근 계간 '문학의 문학'에 장문의 '박경리론'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정치 논쟁이 아니라 미학 논쟁을 더 원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 글이다. 그런데 종종 참지 못하고 그의 입에서 상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가 정파적 이익에만 사로잡힌 헛된 논쟁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성장과 안보를 중시하는 새로운 진보를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