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허벅지를 말하는 꿀벅지란 표현은 인터넷에서 ‘돈’이 되는 단어다. 지난 한달간 ‘꿀벅지 연예인대세’ ‘꿀벅지 만드는 법’ ‘나도 꿀벅지미인’같은 기사가 수없이 올라왔다. 한 여교생이 여성부 게시판에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니 언론에서 쓰지 말게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고, 여성부는 이를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성적 수치심이란 개인이 판단할 사항’. 이 주장이 나오자, 남성들은 “초콜릿 복근, 짐승돌도 남성비하적 단어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연예인이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 그걸 환금하는 시장에서 그의 몸이나 매력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 ‘성 비하’에 해당하는가 하는 논란은 연예 산업 측면에서 보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건 매력을 사고 파는 시장에서 일상적인 흥정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불쾌한 것이라면, ‘최고의 섹시배우’, ‘남성미 물씬’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쓰지 말아야 할 표현이다.
'꿀벅지'란 표현이 특정 연예인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가 아닌가, 혹은 집단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명예를 더럽혔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논의의 가치가 없다. 꿀벅지는 저급한 단어고, 동네 아저씨가 지나가는 직장여성에게 "꿀벅지네"라고 말했다면, 조용히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하면 된다.
문제는 꿀벅지, 짐승돌이라는 표현을 매일매일 생산해내는 '육덕(肉德)의 제국' 대한민국의 수준이다. 요즘 연예인으로 뜨려면 30, 40대 이상의 '시선'을 받아야 한다. 어떤 중년 여성들은 꽃미남 연예인의 팬클럽이고, 걸그룹의 팬에는 아저씨들도 상당수다. 20대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이 '걸그룹'이라고 지칭되는 것에 보여지듯, 젊은 여성을 욕망하는 '롤리타 신드롬'을 가장 합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게 바로 팬덤이다. 중년이 걸그룹의 노래를 아는 것이 '구린내 나지 않는 중년'의 에티켓이 됐고, 애들이 바글바글한 콘서트 장에서 환호하는 아줌마 모습이 더 이상 '주책'이 아닌 시대가 됐다. 좋은 취미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저 하나의 도락 수준을 넘어섰다. 중년들은 스스로의 몸을 ‘개조’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중년의 성형은 미래를 위한 경쟁력으로 포장되고, 이제 그 포장술은 노년까지 지배한다. 환갑을 바라보는 아주머니들이 얼굴엔 보톡스강이 흐르고, 20대나 입는 싸구려 유행 패션으로 무장한다. 아저씨들도 복근을 심어주는 성형외과를 찾아간다. “방부제를 먹은 것 같다”는 것이 최고의 찬사가 된 시대다.
하긴,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웰빙’이라는 것도 ‘육체 제일주의’의 선한 표현방식일 뿐이다.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입고, 좋은 일만 하자는 웰빙적 삶은 그삶의 전제 조건인 ‘좋은 환경’에도 눈을 돌리고는 있지만, 기본적 발상은 물리적 이기주의에 초점이 있을 뿐이다.
모두가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이런 육덕의 시대가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몸이 보배’ 혹은 육체가 경쟁력’이라는 생각은, 사실 ‘돈이면 최고’라는 주장보다 훨씬 더 ‘계급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수술에 많은 돈을 퍼붓는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외모는 ‘유전자 결정론’이 대세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육덕의 시대는 빈부의 격차를 넘어, 경쟁력없는 외모를 가진 자, 몸을 개조할 자본이 없는 자를 ‘이중고’에 시달리게 한다.
우리 사회는 ‘꿀벅지’라는 표현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반발과 그걸 재가공해 장사는 이들이 있을 뿐, 그 근원의 욕망에 대해선 아무도 ‘검토’하지 않는다. 가식없는 세상이 아니라, 염치없는 세상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 철학책에는 거미줄이 쳐지고, 투표율은 점점 낮아지며, ‘이산가족 상봉’ 중계에는 누구도 함께 눈물 흘리지 못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누구도 ‘대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육체의 욕망만이 존재하는 나라, 육덕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