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늘 '심신이 온전치 못하다더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어머니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1895년)은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을미사변 당일 왕태자는 일본 자객의 칼에 맞아 기절했다. 그날 이후 왕태자는 넋이 나간 듯 건청궁을 맴돌았고, 어마마마를 부르다가 혼절하곤 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열국 외교관은 왕태자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이민원 '한국의 황제')

민간에서는 순종이 세자 때부터 '성(性) 불구자'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이렇게 전한다.

"세자가 장성했으나 음경이 오이처럼 드리워져 발기되는 때가 없었다. 하루는 명성황후가 계집종을 시켜 세자에게 성교하는 것을 가르쳐주게 하고 자신은 문밖에서 큰 소리로 '되느냐, 안 되느냐?' 하고 물었으나 계집종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명성황후는 가슴을 치며 자리를 일어섰다."

김홍륙(金鴻陸) 독다(毒茶)사건(1898년)도 순종의 몸을 크게 상하게 했다. 김홍륙은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이었으나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유배형을 받았다.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김홍륙은 이에 원한을 품고 어전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타도록 사주했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셨던 고종은 한번 마시고 토해냈지만, 맛을 구분하지 못하던 황태자는 맛을 보다가 복통과 어지럼증으로 쓰러졌다."

1918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왼쪽부터)가 함께 한 모습.

순종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기록도 있다. 1907년부터 13년간 궁내부에서 일한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1926는 펴낸 '대한제국황실비사'에서 "순종은 자애로운 인정을 지녔으며, 주변인물의 이름과 가족의 일까지 잘 알았으며, 연회석상에서 누구와도 흥미로운 얘기를 나누었다… 명석한 두뇌와 기억력은 참으로 경이로웠다"고 썼다. 순종은 보학(譜學·족보연구학)과 전통의례에도 뛰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순종이 사리판단을 못하거나 대인기피증 같은 정신적 장애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순종은 경쟁과 살벌함을 싫어했다고 한다.

'도쿄에서 스모를 관람하실 때 전하는 선수들이 거대한 몸을 날리며 장관을 연출하는 모습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으시며, 시종에게 '패한 자가 너무 안되었구나. 모래흙투성이가 되어 필시 고통스러울 거야'라고 말씀하셨다.'(대한제국황실비사)

그렇지만 그는 국난을 헤쳐나가기엔 너무 유약했다. 일본에 저항하지 못하고 '왕가의 보전'에만 집착하던 순종은 심장병으로 1926년 4월 25일 눈을 감았다.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은 '책임으로는 이조 5백년의 최대 죄인이요, 인간으로는 일개 가련한 처지였다'고 평했다. 순종 국장(國葬) 때 연희·보성 학생들이 '6·10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땅에 '왕권의 궤적(軌跡)'이 사라지자 '민권의 궤적'이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집]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아편전쟁 이후… 일본은 긴장했고, 조선은 낙관했다]

[발기부전 절반이 심리적 원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