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고려 의종24) 8월 어느 날 고려 수도 개경에 피바람이 불었다. 오랫동안 누적돼 온 무인(武人)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화근은 재위 24년을 맞고 있던 의종(毅宗· 1127~1173)의 황음(荒淫)과 측근 문신 및 환관들의 노골적인 무신(武臣) 무시 때문이었다.

무장(武將)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의종은 수박희(무술대련)를 열어 후한 상을 내림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려 했다. 사단(事端)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수박희 도중 힘에서 밀려 달아나자 의종의 총애를 받던 종5품 문신 한뢰(韓賴)가 나서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이를 지켜보던 의종과 측근 문신들은 손뼉을 쳐가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대장군 정중부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무장들의 안색은 하얗게 변했다.

정중부가 앞으로 나서 한뢰에게 소리쳤다. "소응이 비록 무신이기는 하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는가?" 일단 의종이 나서 정중부의 손을 잡고 위무(慰撫)했지만 여러 해 동안 계속돼 온 무신 모독에 대한 무신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의종은 보현원으로 들어갔고 남은 신하들이 귀가를 위해 문밖으로 나서자 이고 이의방 등 정중부의 핵심부하들이 행동에 들어갔다. 최초의 희생자는 우부승선(조선의 우부승지) 임종식과 어사대(조선의 사헌부) 지사 이복기였다. 이들은 늘 의종과 함께 배를 띄워 종일토록 술 마시고 놀던 인물들이었다.

난(亂)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의종보다 더 놀란 인물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앞서 무신을 희롱했던 한뢰이고 또 한 사람은 좌승선(조선의 좌승지) 김돈중(金敦中)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이기도 한 김돈중은 초급관리 시절 아버지의 배경을 등에 업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뢰는 친한 환관의 도움을 받아 의종의 침상 아래에 숨었다. 정중부가 한뢰를 밖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자 한뢰는 의종을 옷을 붙들고 한사코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고가 칼로 위협하자 밖으로 나온 한뢰는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

김돈중은 개경을 겨우 탈출해 경기도 감악산에 숨어지내다가 현상금을 탐낸 하인의 밀고로 붙잡혀 무참하게 살해됐다. 이후 진행과정은 역사책에서 자주 소개되는 그대로다. 그날 하루에만 50여명의 문신과 환관들이 죽었고 이후 문신도륙이 진행돼 '고려사'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피의 보복에서 벗어난 문신들이 몇명 있다. 평소 의종에게 직언을 해 고초를 겪기도 했던 문극겸(文克謙)은 도망쳤다가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이에 문극겸은 "나는 문극겸이다. 주상께서 만일 내 말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의 난이 있었겠는가? 원컨대 예리한 칼로 단번에 내 목을 베어다오"라고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군사들이 문극겸을 장수들 앞에 데려갔고 여러 장수가 "우리가 평소에 이름을 듣던 자이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후 문극겸은 명망있는 문신들 여럿을 구했고 자신도 병부판사(조선의 병조판서) 등 고위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난이 끝나고 왕위에서 쫓겨난 의종은 남쪽으로 유배를 가면서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의 현손(玄孫)인 서공(徐恭)도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평소의 덕망으로 목숨을 건진 경우다. 이름처럼 공손한 성품의 서공은 오히려 문신들의 오만방자함을 비판하고 무인들을 예우했기 때문에 정중부는 직접 순검군 22명을 보내 서공의 집을 호위케 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

의종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승선(조선의 승지) 노영순의 경우에는 본래 집안이 무관이었고 그로 인해 여러 무관과 친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 목숨을 구한 노영순도 재상에 해당하는 평장사에까지 오른다.

한편 무신(武臣)세상을 열어준 장본인인 의종의 말로는 비참했다. 숨죽이고 있던 의종은 9월 1일 사람들을 모아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의종은 왕위를 내놓고 거제현으로,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당했고 태손은 살해됐다.

명종 3년(1173) 8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한번 개경에서는 문신 도륙이 진행됐다. 거제에서 경주로 옮겨졌던 의종은 같은 해 10월1일 그곳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 근처에서 이의민에게 무참하게 살해돼 연못에 던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