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외교통상부의 한 회의실에서 자체평가위원회가 열렸다. 외부 인사들이 외교부의 상반기 실적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정책기획국, 조약국, 대변인실 소속 10여개 과에서 과장과 실무직원 한 명이 한팀이 돼 차례로 브리핑을 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브리핑하는 과장은 남자였고 옆에서 지원하는 실무직원은 여자였다.

2000년 이후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가 급증하면서, 외교부는 '과장 이상은 남자, 실무급은 여자'인 구조가 됐다. 외교관들은 "국·실장 회의에 들어가면 온통 남자뿐인데 실무선에서 일할 사람을 찾으려고 돌아보면 다 여자인 상황이 됐다"고 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이날 브리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대표적인 여초(女超) 부서인 유엔과의 경우, 직원 15명 중 과장·서기관·행정지원을 하는 공익근무요원 2명을 제외한 11명이 여성이다. 인권사회과·인도지원과·개발정책과도 모두 과장과 서기관 한 명, 공익 외엔 여성들이다. 직원이 10명인 문화외교정책과는 서기관 1명과 공익을 제외하면 과장과 차석까지 다 여성이다.

지난 2000년 20%였던 외무고시 여성 합격 비율은 계속 높아져 2005년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2007년과 2008년엔 합격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올핸 48.8%가 여성이었다. 증가추세가 올 들어 다소 꺾인 것은 외시·행시를 포함한 공무원 시험에서 나이 제한이 없어지면서 예년에 비해 나이가 많은 남자 합격자가 늘어난 것이 한 요인이라고 한다.

현재 외교부 내 고시 출신 여성 외교관은 167명(외시 139명·행시 28명)이다. 10년째 계속된 이런 추세는 언어, 전공 등의 특기로 선발된 외교전문 인력(6·7급) 등과 함께 이전엔 존재감이 약했던 여성 외교인력 비율을 2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외교부는 올해부터 여성 외교관도 오지 근무와 숙직에 포함시키고 있다. 여성 외교관 수가 적을 땐 험지 근무나 숙직은 하지 않도록 '배려'했지만, 인력구조상 이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이다.

현재 재외공관 근무 중인 여성 외교관은 89명으로, 이 중 38명이 콩고·탄자니아·짐바브웨 등 최험지를 포함해 근무환경이 어려운 특수지 공관에 근무 중이다.

여성 외교관들이 늘어나면서 외교부 청사 분위기도 달라졌다. 비슷한 색깔의 양복에 굳은 표정의 남성 외교관들만 모여 있어 단조롭고 딱딱했던 10여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중에서도 국제기구국 등이 있는 12층은 여성 외교관 천하라고 할 정도로 남성 외교관을 보기 어렵다. 외교부 12층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화장실이 비좁아서 다른 층을 이용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외교부 내 여성 외교관 중 최고참인 백지아 국제기구 협력관은 3년 전 말레이시아 공관에 부임했다. 한국대사관에 오래 근무한 현지 여성 직원들은 "한국 여성 외교관은 처음 봤다"며 놀랐다고 한다. 올해 귀국하자 이번엔 오랜만에 만난 주한 외교관들이 "한국 외교부에 여성 과장들이 늘었다"며 반기더라고 했다. 외국인들 눈엔 남성외교관 일색의 한국 외교부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여성 외교관 증가는 외교부의 근무환경도 변화시켰다. 이명렬 정책총괄과 과장은 "해외근무를 마치고 몇년 만에 돌아와 보니 삼겹살에 소주 먹고 노래방에 가던 과거의 회식은 사라지고 스파게티 먹고 영화 보러 가는 분위기로 바뀌어 놀랐다"고 했다.

한 課에 남자 둘·여자 여섯 “어휴, 집사람은 제가 이렇게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고생하고 있는 줄 모릅니다.”외교통상부의 여초(女超) 부서 중 하나인 정책총괄과 이명렬 과장은“여성 외교관들은 논리적이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다”고 했다. 왼쪽부터 이우영, 오유나, 이명렬 과장(의자에 앉은 사람), 김일응, 김영애, 윤주영, 김경현, 천의진씨.

여성 외교관들이 남자들에 비해 자신의 의견을 더 자유롭게 표현해 부내 의사소통이 더 활발해진 것도 달라진 점이다. 임재홍 기획조정실장은 "여자 외교관들이 더 활발하고 저돌적인 데다 개성도 강하고 자기 의견도 명확하다"면서, "요즘은 남자들이 오히려 더 순종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외교부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탈권위주의적이고 부드러워졌다. 부하 직원들에게 거칠게 말하는 상사들의 말투도 조심스러워졌고,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던 의전도 여성 외교관들에게 맡겨보니 더 자연스러워지더라고 했다. 그러나 과장 중엔 "여자들이 50%가 넘는 과의 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니 이전에 여자들과 본격적으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 공무원 비율이 급증하는 현상은 외교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서도 여성 합격자 비율이 높아지면서, 행정부와 검찰, 법원 등도 과거에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여성들이 밀려들어 오는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외교관의 경우엔 오지를 포함한 해외근무를 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외교부의 고민이 더 큰 상태다. 고위직 외교관들끼리는 "외시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이 50%가 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을 정도다. 3년 전부터 외시 여성 합격자 비율이 70%에 육박하자, 쿼터를 정해서 일정 비율의 남자를 반드시 뽑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최근 몇몇 고위 외교관들이 사석에서 "여성 합격자가 너무 늘어나고 있으니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그러면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을 뽑지 말란 말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 해 5~6명의 여성 외시 합격자를 배출하는 서울대 외교학과의 경우 한 학년 정원 27명 중 여학생이 60~ 90%를 차지한다. 한 해 30~40명씩 뽑는 외시에서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만 조금 덜 뽑아도 여성 합격자 비율 조절이 가능하다는 농담이었다.

외교, 국제분야의 여초 현상은 외교부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외교부가 국제기구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5명씩 선발하는 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초급국제기구전문가) 시험에서도 늘 여성 합격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한 외교관은 "남자를 뽑으려야 뽑을 수가 없을 정도로 경쟁력 있는 여성들이 몰려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국제기구 지원자나 외시 응시자가 많은 각 대학의 외국어 전공학과와 국제대학원 등은 다른 과에 비해 여학생 비율이 높다. 외교관 지망자가 많은 교육기관 자체가 여초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성 외교관 증가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인 것이다. 백지아 협력관은 "사회 전반적으로 국제관계와 외국어 분야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높아서 여성 외교관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외교부로 밀려들어 가는 여성들의 흐름은 앞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 사업가의 이점
"여성의 원숙함은 재난을 막아주는 방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