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씨 드러보소. 연희('연극'을 의미함) 개량한다 하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여러 달을 유전타가 근일에야 나왔다니 무슨 연희 배워왔나. 연희 개량 고사하고 동서분주 출몰하는 공의 형상 볼작시면 연희보다 재미있네. 공의 일도 가탄하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0일자 '시사평론' 난에 실린 글이다. '시사평론'의 글들은 모두 '아무개씨 드러보소'로 시작하여 '가련하다' '가증하다' '딱하도다' 등으로 끝나는데 평론이라기보다 '가십(gossip·가벼운 읽을거리)'에 가까웠다. 당대 최고의 신소설 작가로 인기를 누리던 이인직에 대해 대한매일신보가 "가히 탄식할 만하다"고 조롱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극장 '원각사'(1960년 화재로 불타는 장면)(사진 오른쪽)과 이인직은 '혈의 누'(사진 왼쪽).

이인직은 '혈의 누', '치악산', '귀의성' 등 신소설을 발표하고 극장 '원각사'(1960년 화재로 불타는 장면)를 세워 신극운동을 선도한 엘리트였지만, 실은 총리대신 이완용의 하수인으로 한일병합 공작을 돕고 있었다. 그는 신소설 '은세계' 연극 공연 후 연극 개량을 명목으로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사실은 이완용이 주도하던 합병 문제에 대한 정탐이었음을 신문은 꼬집은 것이다. 1909년 8월 초 이인직은 이완용을 만나 "2천만 조선인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6천만 일본인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라며 '한일병합'의 결단을 촉구하였고 "하루라도 빨리 시국을 결말짓는 것이 좋겠다"는 이완용의 뜻을 들은 뒤, 이를 조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에게 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인직의 이런 행동은 그의 출신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인직은 조선 말기 영의정까지 지낸 이사관(李思觀)의 후손이지만 서출(庶出·첩이 낳은 자식)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홍길동전'에서 보듯 서출들의 설움이 컸는데, 조선 후기에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이는 양반 수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평민들이 양반 신분을 사서 그 수가 늘어나자, 관직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그러자 조정은 과거시험에서 서출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합격하더라도 한직으로 돌렸다.

머리가 뛰어났던 이인직은 이런 연유로 양반이 통치하는 조선사회에 거부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갑오경장 이후 적서(嫡庶)차별이 철폐된 뒤 나이 사십에야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시절 동경 미야코신문(都新聞) 견습기자로 있을 때 그는 일본의 문물에 경도되어 조선의 현실을 철저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귀국한 뒤에도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창간을 주도했다.

1906년에 쓴 '혈의 누'에 그의 정치의식이 드러난다. 소설은 낡은 조선과 개화된 일본을 대비한다. 주인공 옥련이 일본 군의관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나 문명개화로 나아간다는 내용을 통해 일본을 '인도적 구원자'로 설정했다. 소설 속에 정치의식을 숨겨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