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표 KAIST 총장

미국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50년간 미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도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과학기술의 이노베이션을 추진해 왔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벤처기업의 성공 스토리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모든 놀라운 성과를 미국은 어떻게 반세기 만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미국이 교육·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매우 다양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역사적인 사건과 정책들이 이 분야에서 미국의 성공을 뒷받침해 왔을 터이지만, 필자는 종종 사석에서 "미국이 과학기술, 대학교육 그리고 산업에 힘을 집중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히틀러'와 '소비에트연방'의 공헌"이라고 우스갯소리를 가장해 이야기한다.

이유인즉슨, 히틀러는 1930·40년대에 훌륭한 유럽의 과학기술자들을 미국으로 망명하게 한 장본인이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기술자들은 대학, 연구기관, 정부와 산업체 등지에 흩어져 자신이 소속된 조직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그들의 전문성은 미국의 과학기술 분야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돼 주었고, 그들 중 몇몇은 더 나아가 미국 경제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구소련 또한 미국의 과학기술과 대학발전에 히틀러 못지않은 기여를 했다. 미국은 냉전시대 소련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예산에 연방예산의 약 6%를 할애하였고, 과거에 비해 국방 R&D에 더욱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또한 국가의 미래 안위까지를 담보하기 위해 미 국방부는 제한된 수의 대학을 선택하여 특정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중 장장 30년 이상을 지원한 분야도 있었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은 미국 대학이 전산, 재료, 제어기술, NC머신, 분자증폭기와 레이저, 소프트웨어 그리고 항공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했다.

한편 미국과 달리 대다수의 유럽 국가는 미국의 비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국방 R&D에 대한 투자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자국 내 거의 모든 대학에 R&D 자원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그 결과 유럽 국가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연구대학과 이노베이션 허브를 갖지 못하게 됐으며, 신기술을 창조하고 최첨단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등의 연구실적은 크게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가 아닌 주(州)정부가 공립학교를 지원한다. 또한 탄탄한 재단을 갖춘 강한 사립대학이 많기 때문에, 연방정부는 R&D 예산을 원하는 결과를 창출하도록 집중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주립대학의 교육 관련 예산은 주정부가 지원하며, 연방정부의 집중적인 R&D 지원은 여러 기관을 매우 우수한 연구대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사용된다.

우리의 경우 교육과학기술부가 모든 국립대학의 교육과 연구분야를 동시에 지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시스템은 당연히 대학의 기초교육 인프라 지원요구와 연구 지원요구 사이에서 갈등을 빚어낸다. 즉, 교과부에서 교육분야에 더 많은 예산을 사용하게 되면 연구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줄어들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미래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교과부가 지원하는 프런티어사업과 같은 특성화사업도 교육관련 미션과 경합해야 한다. 이렇게 교과부의 단일예산으로 대학의 인프라와 연구, 두 가지를 지원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커플드 시스템(coupled system)으로는 미국의 예처럼 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집중적인 R&D 지원을 하지 못한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큰 발전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분명한 연구 목적을 세우고, (2)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원을 집중하며, (3) 강한 3차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대학 인프라를 구축하고, (4) 확립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구자들에게 지속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또한 창의적인 사고로 이를 주도할 인적 자원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기술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상상력이나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을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우리나라도 정부의 강한 리더십 하에, 산학연의 협력을 바탕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획기적인 이노베이션을 추진하게 하는 몇 가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선택과 집중을 통해,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여 세계를 선도하고, GDP를 두 배 이상 증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값진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