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차기 총리로 확정된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7일 미국 뉴욕타임스지 기고문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 시대는 막을 내리고 다극(多極)체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글은 즉각 미국 내에서 반미(反美) 논란을 낳았다. 하토야마 대표는 "결코 반미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차기 일본 총리가 반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는 자체가 과거엔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민주당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 '미국에 할 말을 하고 필요하면 노(no)라고도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더 많은 감축을 위해 기존의 미·일 합의를 바꾸려 하고 있다. 인도양에서 미군 주도 다국적군에 대한 급유 지원활동도 내년 1월로 끝내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국무부는 "기존의 미·일 합의를 바꿀 뜻이 전혀 없다"고 반응했다. 일본 민주당도 집권 이후엔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지금 반세기 넘은 미·일 동맹 역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신 일본 민주당은 아시아 중시론을 굳혀가고 있다. 하토야마 대표 등이 내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한국·중국 등 인접국들과의 우애(友愛)를 기본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새 정권의 아시아 중시론은 본질적으로 중국의 급격한 부상(浮上)이 낳은 변화로 봐야 한다. 일본은 수년 내에 GDP에서 중국에 역전당하게 된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자부심을 잃게 된 일본 지도부와 국민의 심중이 어떤 것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중국과 일본이 아시아 헤게모니 쟁탈전에 다시 나서게 된다면 그 파고(波高)는 한반도로 직접 밀려들게 될 것이다.

일본 민주당은 북핵 불용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북한과 직접 교섭에 나설 뜻을 비치고 있다. 일본은 경우에 따라 북한에 막대한 돈을 퍼부을 수 있다. 미·일, 중·일, 중·북, 북·일 관계가 바뀌기 시작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전략의 밑바탕에도 지각변동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하토야마 대표는 지난해 5월 민주당 대표 취임 이후 첫 외국 방문으로 한국을 찾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도 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에선 과거 자민당과 같은 입장이지만, 민주당 정권이 지금의 자세만 지켜간다면 한·일 간 갈등의 소지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 내엔 역사 인식에서 자민당 정권과 차이가 없는 인물들도 수두룩하다.

일본은 중국에 떠밀리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GDP가 영국이나 프랑스의 두 배에 달하는 대국이다. 세계적 첨단 원천 기술의 4분의 3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나라가 일본 역사상 사실상 처음으로 정권 교체라는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일본 새 정권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오랜 대외노선도 '탈미입아(脫美入亞)'라는 새로운 길로 바꾸려 하고 있다. 일본이 미국을 벗어나 독자적 아시아 전략을 펴겠다는 것은 일본의 재무장과 군사대국화라는 흐름을 강화할 소지가 없지 않다. 우리는 시장(市場)은 중국에, 기술은 아직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다. 일본 새 정권의 출범은 한국이 중·장기적 국가 전략을 서둘러 가다듬어야 한다는 재촉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