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감기와 미열 증세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해 폐렴 확진 판정을 받은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아왔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오후 1시35분쯤 한때 심장 박동이 정지된 뒤 1시40분쯤 회복했지만 다시 심장 박동이 멈춰 서거했다.

병원 측은 "맥박, 호흡, 혈압 등 생체활동 지수가 급격히 저하됐고, 인공호흡과 전기충격 등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오후 2시 30분 기자회견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공식 발표한 뒤 "그동안 쾌유를 기원해 주신 국민여러분과 세계의 모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정성을 다해 치료해 준 의료진에게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폐렴으로 입원했던 김 전 대통령이 급성호흡곤란증후군과 폐색전증, 다발성 장기부전을 이겨내지 못했다"며 "고령인데다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인해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것 같아 심폐소생술은 실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아들 홍일·홍업·홍걸씨, 손자·손녀 등 가족들과 권노갑·한화갑·한광옥·김옥두·박지원 등 동교동계 핵심관계자들이 김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의 임시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특1호실에 마련됐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1998. 2~2003. 2)을 지냈다. 지난 2000년에는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홍일(전 국회의원)·홍업(전 국회의원)·홍걸씨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대 장면 당시 부통령이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 후보와 겨뤘으나 패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집권한 직후인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해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했다.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 같은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여당 노태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여당 김영삼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를 계기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은 2번의 대선 낙선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연구 활동을 가졌다.

1995년 7월 정계 복귀 선언과 함께 동교동계 국회의원들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후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냈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여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핫이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기사 더보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일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