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형광등과 에어컨, 책꽂이처럼 만들어진 16층짜리 선반,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르는 굵은 파이프, 하얀 장화와 유니폼·마스크·비닐모자로 무장한 종업원…. 여느 제품 공장 같지만, 실은 일본에서 급속도로 늘고 있는 야채공장의 풍경이다.

상추·토마토·시금치를 1년 내내 대량생산하는 야채공장이 일본에서 50개를 넘어섰고, 한두 해 사이에 100여 곳 더 늘어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농민이 비닐하우스를 늘려 번듯한 공장 형태로 개조하는 식은 아니다. 미쓰비시케미칼이나 중견 식품업체들이 투자의 주역이다. 그동안 채산이 맞지 않아 투자를 주저했으나, 야채 키우는 데 필수적인 조명, 공조(空調), 이산화탄소(CO₂) 공급, 영양분 공급용 액체 등의 생산 비용이 신기술 개발 덕분에 크게 낮아졌다.

일본은 남극 기지에도 소형 야채공장을 만들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신선 야채를 자체 생산해 먹는 유일한 나라다. 일본 정부는 올해 150억엔을 야채공장 설립에 대줄 계획이다. 그 보조금을 받아가는 것은 농민이 아니라 기업이다. 농민에게 주면 연기처럼 사라질 돈을 기업에 주면 신기술 개발, 비용절감 비법 축적에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미쓰비시케미칼의 경우 밭에서 쓰는 물의 10분의 1만으로 12모작을 해낸다.

다국적기업 몬산토나 듀폰은 더 이상 화학회사가 아니라 농업회사로 변신 중이다. 화약공장으로 시작해 화학섬유로 큰돈 벌었던 듀폰은 인류 최초로 발명했던 나일론·스판덱스 같은 섬유사업을 5년 전 매각했다. 아스피린과 제초제로 전세계를 휩쓸던 몬산토는 그보다 훨씬 앞선 90년대 화학 부문을 팔아버렸다. 몬산토의 작년도 매출 중 거의 절반이 옥수수·콩·면화 종자 판매에서 나왔고, 듀폰도 올해 상반기 이익 중 80%를 농업·식량 사업부에서 올렸다.

글로벌 기업들이 농업에 투자하는 이유는 미래의 돈벌이가 식량사업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인구는 급증하고 곡물 생산량은 2025년까지 2배로 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예측이다. 특히 인구 규모가 거대한 인도·중국의 중산층이 크게 늘어나면서 곡물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 산업혁명 시대를 되돌아보면 지구상의 중산층이 급증할 때마다 식량 파동이 반복됐었다. 2007~2008년에 겪은 곡물파동은 서막(序幕)에 불과했던 셈이다.

우리가 식량문제에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인간으로서 생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은 세계 곡물 시장에서 물량을 확보하거나 값을 조정하는 데 어떤 발언권도 없으며, 오히려 70% 이상을 수입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다. 금융을 월 스트리트에 의존하고, 석유를 중동국가에 매달리듯 식량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외국에 손을 벌려야 한다.

이런 막다른 골목길에서 탈출하는 방안으로 정부는 해외에 초대형 식량생산기지를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해외식량기지 구상은 대개 현지 땅값만 올려놓은 채 실패하거나, 사전 조사 부족으로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있다. 농민들끼리 만든 기업형 영농법인을 키우겠다는 계획이 성공 스토리를 몇 개 만들어내기는 했다. 하지만 소수의 조합원이 생계를 꾸리는 수준의 조그만 성공이었을 뿐, '저렇게 하면 국가적인 식량 고민이 해결되겠다'는 수준에는 까마득하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일본에서 시도하는 방식은 한국과는 정반대다. 농민에게 농업회사를 만들고 이익을 내는 경영 노하우를 터득하라고 하지 않고, 기업이 농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도록 해주며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일본의 웬만한 백화점 지하수퍼에 가면 알 에프 원(RF1)이라는 고급 야채 코너가 있다. 록필드(Rockfield)라는 식품회사가 운영한다. 이 회사는 8년 전 도요타자동차에서 임원을 영입, 야채 생산부터 유통과정을 도요타 방식(JIT)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자동차를 조립한 후 고객에게 넘길 때까지 밟는 과정을 농산물에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그 결과 야채에서 많이 나오는 쓰레기는 줄어들었고, 유통 과정에서 신선도는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기업이 제조업 경영 방식으로 농산물 유통·판매를 개혁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우리는 '농업은 농민의 것'이라는 전제 아래 농민에게 기업가 정신을 심어주겠다는 접근법으로 2000년대 들어서만 수십조원을 허비했다. 농촌, 농민이라면 그저 도와줘야 한다는 원초적인 정서로는 국가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앞으로는 농민보다는 대형 식품회사나 유통회사에 보조금과 연구개발비를 더 지원하며 근본적인 식량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농민들 생계문제는 별도대책으로 해결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