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이은결(28)의 작업실은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의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에 있었다. 공장 창고처럼 생긴 마술 공장에서 '예비역 해군 병장'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186㎝의 키에 떡 벌어진 체격. 기계처럼 억센 손아귀 힘을 기대했는데 악수하는 손이 의외로 부드러웠다.

베이징에서 열리는 세계마술연맹(FISM) 챔피언십 대회에 게스트로 초청된 그는 꽤 바빠 보였다. 3년마다 열리는 FISM 대회는 '마술 올림픽'이라 불린다. 이은결은 2003년 네덜란드 헤이그 대회에서 2위, 2006년 스톡홀름 대회에선 제너럴 매직 부문 정상에 올랐다.

―7월 13일 전역했죠. 수상 경력이 많아 군 면제가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당시 마술 열풍이 불었고, 소속사에서 '위쪽'과 작업을 벌였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결국 물거품이 됐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민감한 게 군대 문제 아닙니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업실은 후텁지근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사진기자의 콜이 벌써 스무 번을 넘고 있었다.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이은결은 여전히 환한 얼굴로“한 번 다시 갈까요”했다. 좀 더 시간이 흘렀고, 어느 순간‘펑’하고 그의 손안에서 불꽃이 터졌다. 아스라한 연기 한 자락이 피어올랐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환상적이죠? 아까 그랬잖아요. 마술사가 아니라 일루전 아티스트라고

―한창 주가를 날릴 때였는데, 아쉽지 않았나요.

"2004년 소속사 문제로 거의 1년의 공백기가 있었어요. 활동을 못하게 될까 두려웠죠. 2006년 FISM 1등상으로 재기했는데 또 슬럼프가 왔습니다. 뭔가 매듭을 지어줄 계기가 필요했고, 2007년 6월 11일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막상 입대하자니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입대 전 해군 관계자들을 만났어요. 제가 하는 마술은 무대에서 하는 '큰 마술'인데, 이분들은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그런 마술도 걱정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요. '스케일을 유지하면서 그동안 못 했던 자선공연을 하자' '해군의 마술, 그래 거북선을 이용한 마술을 해 보는 거야.' 머리가 자글자글 돌아갔습니다. 입대 직전까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죠. 오히려 설��다고나 할까요."

―제대로 된 마술을 할 수 있다는 입대 전 바람은 이뤄졌습니까.

"첫날 신고식 때의 절망감은 절대 못 잊어요. 지금은 전역한 분인데, 첫 마디가 이랬습니다. "큰 (마술) 도구 갖고 할 생각하지 말고 동작을 크게 해." 머리가 하얘졌죠. 군 생활 2년 1개월 중 그때 충격이 가장 컸습니다."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다는데 뭡니까.

"앞으로 언제 이런 소박한 무대에 서겠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은 겁니다. 크고 화려한 무대에 숱하게 서 봤지만 작은 무대에서 느끼는 잔잔한 감동도 참 좋거든요."

―그래도 세계 챔피언이었는데.

"2002년까지 저는 누가 마술을 보여달라고 하면 무조건 했어요. 그게 마술사의 본분이라 생각했거든요. 아무 때나 가수에게 노래해라, 개그맨에게 웃겨봐라 해서 기분 나빠한다지만 저는 언제 어디서든 준비돼 있어야 진짜 마술사라고 생각했거든요."

―요즘도 그럽니까.

"아뇨. 그 생각이 어느 순간 꺾였어요. 외국 대회에서 상을 타면서, 저는 편하게 하고 싶은데 상대방의 기대치가 확 높아진 걸 느꼈죠. 자연히 부담도 커졌고요. 웬만하면 안 했어요. 근데 입대해서 예전 그때가 생각난 거예요. 훈련받다가 휴식 시간에 한 꼭지, 이런 식이었죠. 마술을 하면서도 재미있어요."

―이전에도 마술병이 있었나요.

"마술병은 해군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05년 입대한 전창우씨가 최초였죠. 2호는 후배 마술사인 최형배, 다음은 홍준표 그리고 제가 4호였어요."

―화려한 실내 공연을 주로 선보였는데, 군에서의 공연 환경은 어땠나요.

"2001년 이후 사회에서는 야외 공연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바람 불고, 관객들 집중도도 떨어지고, 대기실도 없고. 군대 환경은 이 삼박자를 모두 갖췄죠. 마술사에겐 신비감이 최고 중요한데 이게 어려워요. 보통 임시로 가림막을 친 대기실에 숨어있는데, 소변은 가급적 참지만 정 안 되면 페트병에 실례하기도 해요. 공연 전에는 절대 안 나갔죠. 공연 시작 전 모습을 보이면 김이 새니까요."

뒤돌아 뭔가를 준비하나 싶더니 손바닥보다 큰 카드가 이은결의 손끝에서 발딱 일어섰다. 어떻게 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씩 웃기만 했다.

―매니저가 없어 불편하지 않았나요.

"제 마술은 꼭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박동준씨와 동반 입대했습니다. 처음엔 제자였는데 지금은 동반자라고 할까요."

―마술 도구는 어떻게 구했나요.

"10년 전부터 제가 쓰던 도구를 다 가지고 갔습니다. 작게는 카드부터 마술 테이블은 물론 앵무새까지도."

이은결의 마술병 데뷔 공연은 2007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독도함 배 안에서 열렸다. 이후 1년 동안 벌인 공연이 120회를 넘었다. 1주일 단위로 전국을 누비며 동료 장병과 복지 시설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는 2007년 12월 31일, 대전엑스포 야외무대에서 열린 공연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2008년 새해를 맞이하는 시민의 타종행사를 앞둔 자리였다. '미친 듯이 추운 날' 하늘하늘한 여름용 마술복을 입은 그는 새파랗게 질렸다. 손가락이 굳어 감각이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지팡이가 사라지고 로프가 나타나는 마술을 선보였다. 마지막 코너는 새하얀 눈가루가 쏟아지는 마술. 때마침 펑펑 쏟아지는 탐스러운 함박눈을 맞으며 이은결은 눈물을 삼켰다.

"무대를 철거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씻고 자리에 누우니 새벽 2시쯤 됐습니다. 다음날 1월 1일 식기당번으로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높은 분'들의 행사도 많이 불려다녔겠군요.

"그게 좀 힘들었어요. 제가 술을 거의 못하는데, 고생한다고 잔을 권하시는 분이 있어서…. 안 받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고. 중국군의 높은 분이 오셨을 때가 기억납니다. 비둘기 마술을 했는데, 끝난 뒤 비둘기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집요하게 물으셨어요. 제가 '국가기밀이라 말 못한다'고 하자, 그럼 대신 술을 마시라고 해요. 글라스 가득 채운 중국 술을 두 잔 거푸 마시고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뻗었습니다."

―고집이 센 편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닌데, 마술사의 자존심이란 게 있잖아요. 한 번은 '최고 높은 분'이 마술복 등 뒤에 '대한민국해군' 여섯 글자를 큼직하게 새겨 넣으라는 겁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마술사는 신비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죠. 근데 이걸 새기면 차력복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그분 예편하시기 전까지 끝까지 버텼습니다."

이은결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은은한 물결처럼 살아가라는 뜻으로 지은 순 한글 이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와서 잠신중, 현대고를 나왔다. 마술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방학 때였다. 정하성 원장이 운영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마술 아카데미인 에디슨 월드매직 학원에서였다. 이은결의 홈페이지에는 열다섯 소년 시절 마술과 처음 만난 순간을 기록한 글이 있다.

'마술사 아저씨가 색깔을 사방에서 따는 시늉을 하고 책장을 넘기자, 방금 전까지 까만 테두리뿐이던 그림에 예쁜 색깔이 입혀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 생애 처음 보는 마술이었다….'

―1981년생이라고 했죠.

"10월 2일생입니다. 닭띠 해, 닭 달, 소 날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손이나 말로 하는 재주가 있다고 사주에 나와 있답니다. 사기꾼 사주도 비슷하다고 하는데, 마술사가 됐으니 정말 잘 풀린 것이죠. 재미로 몇 군데서 봐도 다 같은 얘기가 나와요."

―어릴 적 마술의 무엇에 그렇게 끌렸나요.

"나는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는 그 사실이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입학 첫날 짝꿍에게 동전 마술을 하나 보여줬는데 그냥 뒤집어지는 거예요."

―공부는 잘했나요.

"정말 못했어요. 50~60명 중 45등 정도. 공부보다 마술에 매진했죠."

―마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고2 때였죠.

"친한 형과 대학로에서 무작정 거리 공연을 했어요. 젊은 애들이 "여기 마술합니다" 소리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한 코미디 마술이었죠. 우리가 공연할 때마다 근처에서는 헤비메탈이나 사물놀이 공연이 열렸어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했는데, 얼마나 호응이 좋았는데요."

―대학은 안 갔나요.

"졸업하고 안성에 있는 동아방송대를 1년 다녔는데, 바로 활동을 시작해서 졸업을 못하고 자퇴했습니다. 지금은 경운대 학생입니다."

―존경하는 마술사는 누굽니까.

"마술사보다 화가 피카소와 팬터마임의 거장 마르셀 마르소를 존경합니다. 피카소는 모두가 2차원 미술의 종언을 얘기할 때 입체파를 창안해 평면을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했잖아요. 마술사에겐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 스태프가 필수인데 마르셀 마르소는 플랫한 화이트 조명 아래 맨몸으로 나와 관객을 울고 웃기죠. 5분 동안 기립 박수를 치며 '이게 마술이구나' 싶었습니다."

200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매직콘테스트는 젊은 천재 마술사의 등장을 알린 무대였다. 뽀얀 피부의 '번개머리' 스무살 청년은 비둘기와 카드를 이용한 현란한 마술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한국인이 국제마술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2002년에는 미국마술사협회(SAM) 100주년 기념 마술대회에서 수상했고,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SA 마술 챔피언십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3년에는 라스베이거스 세계매직세미나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마술사라는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던데.

"일루전 아티스트(illusion artist)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환상술사죠. 마술이라는 용어에는 묘한 이미지가 있어요. 밤 업소의 쇼 프로나 서커스 같은. 빤짝이 옷을 입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스테레오 타입 있잖아요.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저는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도 토킹 매직을 했어요. 얘기로 풀어가는 마술."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 것 같습니다.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 다른 닉네임을 쓸 수 있었지만, '은결 리'를 고집했습니다. 다나카·야마구치는 일본인, '은결 리'는 한국인 아닙니까. 지금은 '이지 리(EG LEE)'를 씁니다."

―마술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2001년 대회 때 우승한 마술 이름이 '퍼스트 액트'(First Act)입니다. 비둘기와 카드가 나오는 마술인데, 저의 첫 번째 수상작이자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의 첫 레퍼토리죠. 대회 전 두 달 동안 그 마술만 생각하며 집에도 안 들어갔어요. 밥·잠·연습, 이게 전부였어요. 당시 연습실이 지하였기 때문에 낮밤 구별이 없었죠. 하루 두세 시간이나 잤을까요. 8분짜리 마술을 8년째 만들고 있어요. 계속 진화하는 겁니다."

―마술 소재는 어디서 얻는지요.

"책, 영화, TV…. 모든 것이 소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적어놓죠. 메모광인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도하는 마술이 있습니까.

"하나의 주제가 이야기로 쭉 이어지는 마술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앵무새가 나타나고, 그게 점점 줄어 작은 알로 변하고…. 내년 콘서트에서는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데이비드 카퍼필드식 거대한 스케일의 마술은 못하는 겁니까, 안 하는 겁니까.

"그건 카퍼필드의 마술이잖아요. 제가 남산타워를 없앤다 해서 이슈가 될까요. 그의 마술에서 중요한 것은 큰 걸 없앴다는 게 아닙니다. 자유의 여신상이나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세계인이 누구나 아는 것을 대상으로 마술을 했다는 겁니다."

―없앨 순 있습니까.

"방법을 내면 됩니다. 마술은 가능성이에요. 불가능이 없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힘들지만 할 수 있어요. 없애는 방법?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생각을 아예 안 합니다. 왜? 그 시간에 다른 걸 하죠. 제 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마술 방법은 모두 기록해 놓습니까.

"'세팅지'라는 걸 만들어 기록해 둡니다. 하지만 거기 적을 수 있는 수준은 어떻게 트릭을 하는가 정도입니다. 트릭을 충분히 소화해 트릭이 아닌 것처럼 보여주는 경지는 어떻게 기록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그건 몸으로,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죠."

―마술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입니까, 표현입니까.

"기술은 언제나 누구든 카피(copy)가 가능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건 절대 못 따라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술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술과 방법론 위주의 마술을 하면 관객들은 내가 어떻게 속이려 하는가에만 집중할 겁니다. 관객들이 마술사를 째려보게 만드는 거죠. 순수하게 빠져들어 동화되는, 마술사에 매혹되는 마술을 하는 것. 그게 진짜입니다."

―비밀스러운 마술 기법은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을까요.

"마술의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저도 책을 냈지만, 넘지 말아야 할 금도란 게 있어요. 근데 어쭙잖은 마술사들이 그 선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유명해지려고 수많은 후배들이 싹 틔울 수 있는 씨앗을 짓밟아서야 되겠습니까."

―마술 기술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시대죠.

"마술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디카와 인터넷입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 공연을 풀이해서 유튜브에 올리기도 합니다. 작은 것까지 다 보여주는 HD 시대가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겨내야죠."

―마술을 하며 스스로 감동받는 경우도 있습니까.

"연인들과 함께하는 이벤트성 마술인데 2004년부터 시도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할 때 마술이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죠. 매번 감동의 물결입니다. 개그맨 최승경씨도 제 콘서트에서 프러포즈했습니다. 사랑의 테마가 흐를 때 사람들은 트릭을 보지 않게 됩니다."

―한때 소속사와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하던데.

"대학로에서 첫 공연을 함께 했던 형이 매니저 일을 봐줬습니다. 사실 제가 그 회사를 먹여 살린 셈이죠(웃음). 근데 돈은 거의 못 벌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입을 9대 1로 나누는 10년 계약이 돼 있더라고요. 월급 200만원과 행사비의 10% 정도가 제 몫이었습니다. 마술책을 냈지만 돈 한 푼 받지 못했죠. 2004년 소속사를 떠날 때 보니 마술 도구만 남았더군요. 지금은 그게 다 재산이지만…. 소송을 걸었고 이겼습니다. 남들의 '0'과 이은결의 '0'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은결 프로젝트 회사를 직접 차린 것도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려는 뜻인가요.

"그렇죠. 직원은 8명으로, 지금 스태프 중 마술사는 없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맥주 500cc 석 잔이면 딱 좋습니다. 마술 연습할 때 가장 행복해요. 상상 속에 언제나 있는 나의 관객은 언제나 기립 박수와 커다란 감동을 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마술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뭘까요.

"천기누설 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보고 할 때도 상도의에 어긋나지 않게 미리 허락을 받는 것…. 그 중 으뜸은 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마술을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그 가능성을 만들어주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목표는 무엇입니까.

"2007년 8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지상 최고의 마술쇼(World's Greatest Magic Show)'에 초청받았을 때 랜스 버튼, 카퍼필드 같은 수많은 '선수'들의 공연을 보면서 마술사의 한계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봤습니다. '태양의 서커스'(Crique De Soleil)가 새로운 예술성으로 볼쇼이 서커스의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