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뿔 났다'. 최근 한나라당과 정부 간의 당·정 협의에서 "인감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냈는데도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29일 '인감 5년 내 폐지'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30일 한나라당 안에서는 "우리가 미디어법 강행 처리 때나 동원되는 정부의 총알받이냐.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가장 강하게 '열 받은' 사람은 조진형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이었다. 그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불필요한 인감증명 제출을 줄이는 것은 좋지만, 5년 내 완전 폐지하는 것은 관행이나 정서적으로 맞지 않다"며 "국회에서 그렇게 허용하지 않고, (관련) 법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행안위는 인감 폐지 입법을 주관하는 상임위로 조 위원장 등 여당 행안위원들의 협조 없이 인감 폐지는 불가능하다. 정부가 인감 증명 대체 수단으로 새로 도입하기로 한 '전자위임장'과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련 법을 제정하고, 주민등록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

지난 27일 당·정 협의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정부는 당초 3년 내 폐지 방안을 가져왔다"며 "그러자 의원들이 부동산 거래는 공인중개사나 법무사 등에 위임하는 사무가 많아 인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정부도 이를 수용했다"고 했다. 그는 "관습적으로 인감을 쓰는 부분은 존중해 주되, 젊은 층엔 전자공인인증제도 등을 도입해 첨단기술로 개인증명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선에서 협의를 끝냈다"고 했다. 그러나 29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발표에선 인감 폐지까지의 유예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렸을 뿐 당측의 건의 내용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한나라당 주장이다.

조진형 위원장은 "재산이 있는 사람은 주로 50대 이상인데, 이들이 5년이 지난다고 (전자위임장 등에) 바로 익숙해질 수 있겠는가"라며 "전자위임장도 해킹에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주성영 당 제1정조위원장도 "워낙 정부에서 폐지를 강하게 주장해 당 정책위에서 '새로운 제도 정착 후 5년 안에 폐지'로 하자고 한 것을 정부에서 그냥 '5년 내 폐지'라고 발표했다"고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새삼 '현 정부의 국회 무시' 사례를 지적하며 분해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한 의원은 "수없이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대통령이 국회를 비능률적인 집단으로 보면서 정부 관료들도 이를 배우고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에서 국회의원을 만나 법안을 설명하고 법 통과를 위해 설득하는 일은 이제 전설이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