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미국의 은행이라면 시티은행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초대형 거물이나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 같은 투자은행을 연상하기 십상이다. 이들 브랜드가 워낙 유명한 데다, 정부마저 '한국판 골드만 삭스를 키우겠다'는 식으로 법석을 떨기 때문이다.

깊은 속을 알고 보면 미국의 진짜 금융 파워는 지방에 자리잡고 있다. 8400여 갖가지 은행 중 96%는 지역은행(community bank)이고, 엇비슷한 숫자의 신용조합(credit union)까지 동네 구석구석에서 영업 중이다. 미국 금융업은 창업·도산의 생로병사(生老病死) 사이클이 활발한 업종이다.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얼어붙었던 작년 한 해만 해도 지역은행 98개가 새로 탄생했다.

동네은행의 생존 방식은 다양하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있는 머천트은행(Merchants National Bank)의 점포는 2개, 종업원은 20명뿐이다. 계좌 개설, 수표 발행 때 떼는 각종 수수료를 전면 면제해주는 전통을 88년째 지키고 있다. 마을 수퍼나 빵집·잡화점 주인들의 예금을 받아 주택자금, 자동차 할부 구입 자금을 대출해 얻는 마진 등 가장 기본적인 은행 서비스로 1930년대 대공황을 이겨냈다. 이번에도 구제금융 한 푼 받지 않고 흑자를 냈다.

뉴저지의 밸리은행(Valley National Bank)은 점포 195개, 외형 20조원 수준으로 제법 크다. 전체 지점 중 3분의 1은 일요일에도 영업하고 콜 센터는 24시간 가동한다. 마을 고객 편의를 우선하는 밑바닥 중시형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임원들 평균 재직 기간은 무려 24년이다. 연봉 액수 따라 메뚜기처럼 직장을 옮기는 월 스트리트 인간이 볼 때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동네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알기 때문에 대출금이 30일 이상 연체되는 비율을 0.56% 선에서 기적일 만큼 낮게 유지하고 있다. 서브 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 대출)에는 단 1달러도 물리지 않은 우량 상장회사다.

미국 동네은행 중에도 이번에 치명상을 받은 곳은 있다. 올 들어 60개가 문을 닫았고, 소형 은행이 점차 줄어드는 현상은 최근 20년 동안 막을 수 없는 큰 물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 은행은 위험한 파생 상품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고, 거대 금융회사들이 모험을 거는 대박 터뜨리기식 영업을 거부한다.

그저 얼굴 잘 아는 이웃에게 상가 임차나 자동차 구입 자금을 대출해준 후 작은 마진을 쌓으면서 은행원은 적은 연봉에 만족하는 경영 구조다. 이런 건전한 은행 영업 덕분에 중소기업과 영세 상인들은 금융위기가 와도 쉽게 넘기곤 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지역은행 주변의 탄탄한 상권을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大路)'라 부른다. 투기가 판치는 월 스트리트와 대비, 중심지 의식이 뚜렷한 셈이다. 저변에 깔린 미국의 금융 파워를 모른 채 우리 금융 당국이나 금융계는 월 스트리트의 대형 금융회사만이 최상의 모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금융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모두가 글로벌 대형 은행으로 가겠다면서 실속 없는 덩치 키우기 경쟁에 다시 돌진하고 있다. 지주회사를 만드는 것도 똑같고, 증권·보험·카드·자산운용·펀드로 확장하는 전략도 똑같다. 후진국 은행 인수 경쟁서도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엊그제 온 나라에 자금 경색이라는 멍에를 씌웠던 실패를 벌써 잊어버렸다. 앞서가는 국제 금융을 한답시고 으스대다가 국민에게 수조원의 세금 부담을 떠안기고도 뻔뻔스럽게 다시 해외로 가겠다고 떠들썩하다.

한국은 앞으로 금융을 전략 산업으로 키워야 한다. 월 스트리트의 한 모퉁이를 맡을 만한 글로벌 주자도 두셋쯤은 나와야 한다. 다만 국민·우리·신한·하나 등 고만고만한 선수들이 똑같은 골인 지점을 향해 판박이 전략으로 뛰는 꼴은 우습다.

이번 위기에서 우리는 초대형 은행들의 치명적인 급소를 보았다. 시티은행을 비롯, 많은 나라에서 대형 은행일수록 사기성 짙은 영업을 하다가 부실화된 후,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화려한 빌딩을 가진 은행이야말로 국가 경제마저 무너뜨릴 악성 바이러스가 더 많이 잠복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미국 지역 은행의 역할을 국내에서는 저축은행이 맡고 있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마저 재벌들 손으로 속속 넘어가고 있다. 재벌에 편입된 저축은행이 모기업보다 동네 레스토랑을 더 알뜰살뜰 보살펴 주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글로벌 싸움터에서 한몫해줄 대표급을 키우면서도 동네 꽃집이 중고 경트럭을 살 때 1000만원을 쉽게 빌려줄 서민형 은행도 키워야 한다. 미국처럼 소형 은행에는 법인세를 없애주고, 공기업이 굴리는 여유 자금을 더 예치해주는 혜택도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