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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안중근이 한상호가 경영하는 여관으로 가니 중노미의 말대로 김동억은 여관 객실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굳은 얼굴로 안중근을 맞은 한상호가 말했다.

"저 손님, 어제저녁부터 몸이 좋지 않다며 포룡환(抱龍丸)을 찾는다, 활명수를 마신다, 심상찮더니 새벽녘에 기어이 일이 터졌습니다. 식구대로 집안사람들 새벽잠을 다 깨워놓은 신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지자 그게 오히려 더 무섭더군요. 문을 따고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저 손님이 시퍼런 얼굴로 혼절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근래 부두 쪽에다 병원을 연 양의를 불렀는데, 다행히도 호열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여관이라 병자를 둘 수 없어 난감해하는데 깨어난 환자가 제 이름을 밝히면서 청계동 서방님과 함께 왔으니, 기별을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혼절하듯 잠들었는데 영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상호가 아침 일찍 안중근을 부르게 된 경위를 그렇게 밝혔다. 한상호는 안중근보다 두어 살 많았으나 열 살이나 손위인 형 한재호가 안중근을 상전 받들듯 하는 터라 몹시 공손했다. 안중근이 한상호의 굳은 표정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김동억을 선교사가 겸영하는 병원으로 옮겼다. 몇 해 전 호열자(콜레라)로 서북 지방에서만도 한 해 수만 명이 죽은 적이 있어 서북 사람들은 모두 호열자라면 펄쩍 뛰었다.

다행히도 안중근이 김동억 곁에 붙어 앉은 재진(再診)에서도 김동억의 병은 호열자가 아니었다.

"유사(類似) 장질부사라는 열병입네다. 호열자만큼 두려운 질병은 아닙네다만, 환자가 무리를 한 탓에 한껏 덧나 이렇게 되었습네다. 여기서 하루 이틀 안정을 취한 뒤에 평양의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을 듯합네다."

일러스트=김지혁

마침 병원을 열고 있던 미국인 선교사가 제법 능숙한 조선말로 그렇게 김동억의 병을 설명했다.

이에 안중근은 김동억을 한상호의 여관에서 미국 선교사의 병원으로 옮기고 주사와 약물로 하루 더 급한 열을 내리게 한 뒤 평양으로 옮겼다. 하지만 평양도 병원 건물이 좀 더 번듯하고 의료기구가 낫게 갖춰져 있다는 것뿐 삼화항에서와 다름없이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의료보다는 선교가 우선인 병원장이 김동억을 입원시킨 지 이틀 만에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어 안중근은 하는 수 없이 김동억을 서울로 데려가야 했다. 못 미더운 조선인 조수에게 김동억을 맡기느니 반나절 기찻길에 시달리더라도 서울의 큰 병원에 옮기는 게 나을 듯해서였다.

어렵사리 기차 편을 구해 서울로 온 안중근은 김동억을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킨 뒤에야 다동 김달하의 집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삼화항의 선교사 병원이 맹탕은 아니어서 세브란스 병원에서도 유사 장질부사로 판정이 났다. 그러나 김동억이 첫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병을 덧나게 한데다, 두 군데 병원을 거쳐 삼백리를 돌아오는 동안에 병은 한층 무거워져 김동억의 상태는 자못 위중했다.

북간도로 떠난다고 여비까지 받고 떠난 터라 도중에 돌아오게 된 게 낯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앓아누운 김동억을 두고 안중근 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의병활동을 돌아본답시고 예성강 일대를 열흘이나 어정거린 죄도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김동억의 처음 증상을 얕보아 병을 키운 책임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 바람에 다동에 눌러앉아 김동억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다시 급변한 시국이 그의 출발을 가로막았다.

중근이 김동억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온 나라가 해아(海牙:헤이그) 밀사사건으로 들끓고 있을 때였다. 그해 7월 초순 대한매일신보가 먼저 외국 신문을 인용하여 광무 황제가 화란(和蘭)의 수도 해아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세 사람을 보냈다는 기사를 내보냈고, 뒤이어 이등박문이 무엄하게도 광무 황제를 찾아가 그 책임을 따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