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 선배님, 선배님이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는 그것조차 모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봐도 개인정보가 안 나오고, 또 선배님과 친했던 여자 선배님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잡지의 지면을 빌려 편지를 써 보게 되었습니다.

이순 선배님이 대학교수와 소설가로 활동하시다가 갑자기 뇌막염에 걸려 쓰러지신 것이 내 기억에는 1986년 9월입니다.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學科(학과) 女(여)선배님으로서(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으셨지요), 또 같이 문학을 하는 동지로서 우리의 인연은 무척 따뜻하고 보람찼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갑자기 쓰러져 긴 병환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병의 증상은 백치 상태가 되어 글도 못 쓰는 형편이었고, 결국 학교(청주대 국문과)에도 못 나가게 된 것이지요. 그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내게는 가장 가까운 異性(이성) 친구이자 문학 동지였으니까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

학창시절의 이순 선배님이 생각납니다. 내가 1969년에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했을 때 선배님은 3학년이셨죠. 선배님은 항상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고, 머리를 허리께까지 길게 길러 순진무구한 내 마음을 황홀한 羨望(선망)으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하지만 1학년 초년생인 나에게 3학년 누나인 선배님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친해지게 된 건 1969년 가을에 국문과 연극부에서 공연했던 작품에 우리 둘이 배역을 맡으면서부터였습니다. 내가 이순 선배님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었지요.

그 뒤 선배님은 학부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24세 되던 나이에 열두 살 연상의 夫君(부군)과 서둘러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결혼식장에 賀客(하객)으로 참석하여 內心(내심)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모릅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헌칠한 키의 선배님이 꼭 동화 속 공주님같이 느껴져서입니다.

그때는 나도 대학원에 입학해서 학과 조교일을 보고 있었는데, 선배님의 첫 직장을 내가 소개해 드리게 되는 일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국문과 사무실로 어느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추천을 의뢰해 와, 내가 학과장님께 말씀 드려 선배님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 대학강사를 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부군이 직장을 그만두셔서 家計(가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나는 詩(시)로, 선배님은 小說(소설)로 문단에 등단을 했고, 틈틈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둘을 기르면서 학교 교사 노릇까지 하는 선배님께선 자주 글을 쓸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 도중에도 우리는 꽤 자주 만나 문학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장래 문제에 대해 서로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선배님이 작가로서 제2의 탄생을 하시게 된 것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하여, 再(재)데뷔를 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뒤 선배님은 많은 원고 청탁을 받게 되어 학교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가시게 됩니다.

병마에 쓰러지고, 남편과 死別하고…

때마침 내가 박사과정을 마치고 홍익대에 전임교수로 취직된 것도 1979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이순 선배님과 만나, 한껏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술을 마시며 自祝(자축)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다가 1년 후 선배님은 연세대 국문과 박사과정에 진학했지요. 그때 내가 선배님을 도와드릴 겸 해서 홍익대학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홍익대학교 내 연구실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1984년 봄에 연세대 국문과로 직장을 옮길 때, 다행히 이순 선배님도 청주대 국문과 전임교수로 발령받아 가시게 되었죠. 그리고 2년 있다가 그만 病魔(병마)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더욱 내가 가슴 아팠던 것은, 몇 년 후 선배님을 간병하던 부군께서 먼저 癌(암)으로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잡지를 통해 접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선배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를 가셨는지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고, 知人(지인)들도 전혀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잊힐 것이다

인생이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게 된 것은 선배님의 急病(급병)이 처음이었고, 그 다음에 내게 닥쳐온 불운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1989년부터 장편소설 를 시작으로 소설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안된 1992년에 소설 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고,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내려 학교에서도 해직되었습니다.

그런 뒤 1998년에 복권되어 학교로 다시 복직했는데, 2000년에 가서는 학과 교수들의 집단 이지메로 '교수 재임명 탈락' 사건이 났어요. 다행히 학교 당국에서 배려해 줘서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까이 지냈던 친구 교수들에 대한 격심한 배신감으로 인해 나는 깊은 우울증에 걸려 학교를 휴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살 시도도 몇 차례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학교에 복직한 게 2004년입니다. 그리고 다시 2007년 내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은 작품이 외설죄에 걸려 또 법적 처벌을 받았지요.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간절히 생각하는 게 선배님이었어요. 내게는 정말 누님 같은 助言者(조언자)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도저히 선배님의 近況(근황)은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살아갈수록, 무서워지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한 치 앞의 위험을 모르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實存(실존)이니까요.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고, 운명이 무서울 때마다 나는 이순 선배님의 돌연한 불행을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요즘 예전에 내게 증정해 주신 선배님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장편소설로 과 단편집으로 , 이 있더군요. 그리고 수필집도 내셨었는데, 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상당한 文才(문재)가 느껴지는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 선배님의 다른 장편소설 와 도 구입하게 됐습니다. 너무 아깝게 잊힌 작품들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선배님의 소설들을 가지고 학술논문도 한 편 써서 학회지에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게 선배님과 가까이 지냈던 후배의 도리가 아닌가 해서요.

지금의 내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순 선배님도 환갑쯤 되셨을 겁니다. 예전에 캠퍼스에서 함께 젊은 낭만을 즐겼던 때를 추억해 보면, 정말로 세월의 無常(무상)함이 느껴집니다.

나도 이제 늙어 몸 아픈 곳이 많습니다. 언제 선배님처럼 쓰러질지 몰라요. 그러나 작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육체의 고통보다 '잊히는 것'일 것입니다.

이순 선배님은 안타깝게도 잊힌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른바 문단이나 학계의 '왕따'입니다. 내가 겪은 筆禍(필화)사건도 벌써 잊혀 가고 있고, 또 내가 죽으면 그 사건은 물론이고 내 작품들 또한 잊힐 것입니다. 선배님의 불행을 생각하면, 자꾸만 나의 미래가 점점 더 불투명하게만 보입니다.

이순 선배님, 아직 서울 어디엔가 계신다면 부디 건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둘이 다시 만나 이야기 꽃을 피워 보고 싶습니다. 2009년 7월에 마광수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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