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본 게 '서정주 시인' 덕분이었다. 국어책에서만 만나던 그분을 만난다는 게, 카메라에 담는다는 게 가슴 벅찼다. 선생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인의 냄새가 물씬했다.

시인의 집에는 잘생긴 대나무 숲이 울창했다. 그런데 대청마루 쪽은 조금 음침했다. 나는 국화꽃 만발한 마당을 상상했던 것일까? 여든 넘은 선생은 햇볕이 잘 드는 작은 건넛방에서 모시 저고리를 입고 시원한 맥주 캔을 들고 계셨다.

그 모습 또한 의외였는데 선생은 "더운 여름엔 시원한 맥주가 최고"라며 웃었다. '더운 여름날 햇볕' '시원한 맥주' '모시 저고리' '대나무…'. 그것들이 십여년의 정규 교육기간 동안 시험문제에서나 볼 수 있던 '서정주 시인'을 만나 느낀 첫 번째 단어들이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나는 왼쪽의 창문을 열었다. 조명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때이기도 했지만 고백컨대 그때까지 어떤 조명 장비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구든 맥주를 그렇게 시원하게 마시는 모습은 처음 봤다. 십수년 전 일이기에 그 인터뷰의 내용들은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을 생각할 때나 이 사진을 들여다볼 때 뇌리에 뚜렷이 떠오르는 것은 '사랑하는 내 아내가' 혹은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쉼 없이 얘기하는 늙은 소년이었다. 빛을 아직 잃지 않은 시인은 소년인 채 아내인 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것을 때 묻지 않은 단어로, 느낌으로 내뱉었다. 사랑이 가득 찬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쉴 새없이 셔터를 눌렀다. 지금이라면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겠지만 당시의 나는 인터뷰 사진에 대한 작은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렇게 좋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인터뷰가 종료됐다.

선생의 집 뜰의 대나무가 나를 살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나무와 서정주 시인은 너무 기가 셌다. '큰' 선생의 인생을 내 프레임에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큰' 사람이라는 건 너무 어린 사진 찍는 여자아이에겐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어디선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촬영 끝나면 선생님과 사모님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그 한마디가 나를 바꾸어 놓았다. 가식을 덮어 멋있게만 찍으려 하고 있던 나는 쇠뭉치로 머리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쉴 새없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하는 늙은 소년을 외면한 채, 국어책에서만 만나던 '서정주 시인'을 찍으려고 하던 '바보'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이 대나무 숲도 버리자. 밖으로 나가자. 담벼락 너머 대나무 숲 머리자락만 걸치고 한 쌍의 소년·소녀를 세웠다. 쑥스러워 하시는 선생께 손을 잡으라고 외쳤다. 머쓱해하는 소년이 소녀의 손을 꽉 잡았다. 딱 6번 셔터가 눌러졌을 때 그는 "뭐 그렇게 많이 찍느냐"며 부리나케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고개를 똑같이 갸우뚱한 채로, 똑같은 고무신을 신고 똑같이 비스듬히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로. 덩달아 나의 카메라 앵글조차 기울어진 채로 수십년을 함께한 담벼락 앞에 선 늙은 소년·소녀의 초상은 그렇게 남았다. 사랑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강하게 각인된 채로….

사랑을 표현하며 사는 집안에서 자라지 못한 내가 아들에게 많이 말하려 노력하고 네살 난 기휘가 "엄마 사랑해요" "할머니 많이 사랑해요"라고 자주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쩌면 그때가 시발점이었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