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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새로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조직책이 지켜야 할 냉철함으로 돌아간 안창호가 안중근의 격정을 지그시 누르듯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칠 동지를 진작 우리 신민회의 일원으로 맞아들이지 못한 데는 제 불찰이 큽니다. 줄곧 누군가를 잊고 있는 듯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바로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동지께서 스스로 국외 망명의 뜻을 품고 우리를 찾아오신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 동지를 우리 신민회에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여러 가지로 숙려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안중근이 적이 실망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안창호가 이번에는 달래는 어조로 받았다.

"우리 신민회가 이 국민을 스스로 새롭게 하는[自新] 방법에는 틀림없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것과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등의 무장투쟁 방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지가 우리 회원이 되고 국외로 망명하면 이는 곧 신민회가 동지를 국외기지 건설을 위한 선발대로 파견하는 것이 됩니다. 곧 해외에서 동지가 벌일 무장투쟁은 곧 우리 신민회의 투쟁활동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민회는 아직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일이나 독립군기지 창건에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곧 동지의 활동을 뒷받침할 물력도 인원도 전혀 확보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동지께서 혈혈단신 맨주먹으로 벌이는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이 우리 신민회를 대표하게 되는 것은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 듯합니다. 그리되면 우리 신민회는 때 아니게 일찍 무장투쟁 노선을 왜적에게 드러내는 꼴이 될뿐더러 부실한 뒷받침으로 세상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동지도 마찬가지, 자신만의 것으로도 무거운 짐에 우리 신민회가 장차 이 땅에서 차지하게 될 무게와 크기까지 얹는 격이 되어 한층 엄중한 왜적의 경계와 감시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어느 편에게도 권할만한 일이 못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귀회(貴會)에 합류한 뒤 귀회가 해외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길 때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나가는 것도 방도가 되겠지요."

일러스트=김지혁

안중근이 아쉬운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와 반대로 동지가 먼저 국외로 나가 발판을 마련한 뒤 우리와 연합하는 것도 또한 방도가 되겠지요. 하지만 서둘러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일은 신입회원의 자격심사를 맡고 있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천천히 생각해 결정하도록 하지요."

안창호가 그렇게 신중하게 받은 뒤 문득 물었다.

"참, 서울에 계실 동안 거처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다동 김달하 선생 댁입니다.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양쪽으로 두루 발이 넓으신 분인데 혹 아시는지요?"

"예, 진작부터 덕망 있는 어른으로 우러르는 분입니다. 다동 저택에도 여러 번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 댁에 계신다면 앞으로도 자주 만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 말에 안중근도 신민회 가입을 두고 까닭 모르게 자신을 몰아댄 조급에서 벗어났다.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그 가운데 하나는 스승 될 만한 이가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천하의 도산이겠습니까? 앞으로 선생이라 부르겠습니다. 도산 선생, 앞으로 자주 좋은 가르침 받겠습니다."

그렇게 느긋한 인사까지 나누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그해 8월 초순 뱃길로 북간도에 가려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까지 몇 달, 안중근은 다동 김달하의 집에서 그 마지막 소명을 기다리며 스물아홉 살의 정념을 불태웠다. 안중근은 백암 박은식과 도산 안창호 다음으로 김종한을 찾아보고 안태훈의 죽음 뒤로 잠시 끊어졌던 교분을 되살렸다. 그때 김종한은 이미 친일행각으로 의심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국채보상운동에서 중책을 맡아 아직은 나라를 걱정하는 옛 개화파 관료의 잔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끼던 문객(門客)의 후인이 찾아오자 반갑게 맞아들이고 그 의기를 북돋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