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한 마음에 대본작업을 접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미니시리즈 담당 부장에게 연락이 왔다. ‘박성수 감독이 미니시리즈를 준비 중인데 우연히 이 대본을 읽고 너무 하고 싶어 한다. 하든 안하든 직접 만나서 대답을 해줘라’ 나는 절대 안하겠다는 대답을 준비하고 나갔다. 주간단막극으로 1년을 예상하고 이야기를 짜고 있었는데 미니시리즈 16회로 끝내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드라마 '맛있는 청혼'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손예진의 모습.

약속장소로 나가 박성수 감독을 만났다. 그가 대본을 읽은 소감과 캐릭터를 분석한 이야기를 하는데 확 신뢰가 왔다. 그 자리에서 마음이 돌아섰다. 의기투합해 정말 재밌는 드라마를 만들기로 했다. 신인들이 캐스팅 됐고 특히 여주인공엔 한번도 TV출연을 한 적이 없는 손예진이란 배우가 왔다. 주변에선 걱정과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나도 괜히 마음이 약해져 방송 전 어느 날 밤, 편집실을 찾아가 촬영 분을 봤다. 아버지(김용건 분)의 중국집 주방에서 몰래 요리를 배우는 모습이었는데 상큼하고 예쁜데다 연기도 차분해서 걱정이 싹 날아갔다. 그 때 그녀가 지금처럼 대스타가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면 과장이겠지만 ‘맛있는 청혼’에서 만큼은 주인공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것이란 확신이 섰다. 내가 생각했던 장희애(손예진의 역)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장희애를 보고 그날 밤 기분 좋게 편집실을 나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리자문을 맡은 김포대학 장혁례 교수, 그리고 당시 리츠칼튼호텔 중식당 주방장 왕사부님과 드라마에 나올 요리의 메뉴를 선정하고 조리법을 들어가며 대본작업을 했는데 정말 즐거웠다. 촬영장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는 왕사부님이 새벽까지 춥고 먼지 날리는 세트에 대기하고 있다가 주인공의 손 연기를 하고 드라마에 나오는 요리를 만들며 밤을 새셨는데, 식사로 배달돼 온 불어터지고 조미료 투성이의 맛없는 동네 짬뽕을 두말없이 맛있게 드시고 촬영을 도왔던 일이다. 우리 스탭 모두 대가의 면모를 느끼며 조용히 불어터진 짬뽕을 먹었다.

주인공 김효동의 이름을 딴 효동각의 촬영은 연대 동문에 있는 ‘희궁반점’ 이란 중국집에서 했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곳에 손님도 넘쳤다. 희궁반점 사장님은 소품으로 썼던 효동각 간판을 그대로 걸고 상호도 아예 효동각으로 바꿨다. 아직도 효동각 앞엔 ‘맛있는 청혼’ 촬영지란 홍보 문구와 신문기사들이 빼곡히 붙어있다.

맛있는 청혼을 하면서 소중한 깨달음도 얻었다. 미리 기죽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홍콩 촬영을 앞두고 장소 헌팅을 가기로 한날, 폭설이 내렸다. 감독, 조감독, 촬영감독, 작가, 현지진행요원 이렇게 다섯 명의 스탭은 홍콩행 비행기에 올라 눈이 그치길 기다리며 계류장에서 한 나절을 대기했고, 기내식에 와인을 마시며 작품회의를 하다 결국 결항돼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렇게 또 일이 꼬였고, 신인들이 캐스팅 됐을 때 ‘맛있는 청혼’이 성공할 꺼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TV출연이 처음이었던 손예진, 권상우 그리고 무명 신인이던 지성,소지섭, 소유진... 이들 모두 꼭 한번 다시 일하고 싶은 훌륭한 배우들이 됐고 드라마는 시청률 30%를 넘으면서 순항했다. 주인공의 말처럼 소망이 깊으니 이루어졌던,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나의 청춘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