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밭에, 우리 밭에 좀 와줘요!"

2일 오전 9시 강원 춘천시 상중도(島). 춘천시청 환경과 직원 28명이 다리를 건너 의암호 상류에 있는 인구 20여 가구의 작은 섬에 들어섰다. 허리가 구부정한 강신길(76)씨가 직원들의 손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괴물이야, 괴물! 아무리 뽑아도, 약을 쳐도 안돼. 매화나무 다 죽게 생겼어요."

강씨를 따라 섬 안으로 5분쯤 걸어 들어가자 330㎡(100평) 규모의 매실 밭이 나왔다. 시청 여직원 한 명이 탄식했다. "어머, 징그러워!"

넓적한 잎이 무성하게 달린 기다란 넝쿨들이 얽히고설키며 온 땅을 뒤덮고 있었다. 구렁이가 먹이를 휘감듯 나무를 칭칭 감아 오른 것도 있었다. 덩굴을 뽑자 그 밑의 풀들이 황갈색으로 변색한 채 죽어 있었다. 춘천시청에서 파견된 현장책임자 황태성(60)씨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이게 바로 '가시박'입니다. 2주 전에 한 번 뽑았는데, 또 이렇게…."

식물이 번성하는 여름철을 맞아 가시박 제거 작업이 한창이다. 황씨를 비롯한 28명은 가시박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식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지난 5월 춘천시청이 임시로 고용한 '제거반'이다. 2009년 7월 현재 환경부에 등록된 생태계 교란 식물은 11종이다. 그중에서도 가시박은 다른 식물들에 특히 큰 피해를 줘 '식물계의 황소개구리'라 불린다.

가시박은 북미가 원산지인 덩굴성 식물로 최대 8m 이상 자란다.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하루 30㎝ 이상 자랄 정도로 생장이 빠르다. '괴력'에 가까운 생장 속도가 가시박이 국내에 들어오게 된 계기다. 1980년대 후반, 농민들이 오이, 호박에 접붙이기 위한 대목(臺木) 작물로 국내에 들여왔다. 가시박 줄기를 끊어 그 자리에 오이 호박 따위의 줄기를 접붙이는 식이다. 학계에선 '안동대목'이라고도 부른다. 최초 상륙 지점이 경북 안동으로 알려진 까닭이다.

가시박은 2000년 들어서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 등으로 2000년 들어 강우량이 많아졌고, 불어난 강물을 따라 가시박 씨가 강변과 주변 농경지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고 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가시박은 현재 강원 춘천, 서울, 인천, 부산, 전남 나주 등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다.

피해 규모도 커졌다. 급속도로 자라는 가시박이 다른 식물과 나무들을 뒤덮어 말라죽게 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덩굴이 반경 5m를 덮어버릴 수 있어, 가시박의 '습격'을 받으면 어지간한 농작물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한다.

지난 2일 강원도 춘천시의 한 옥수수밭에서 인부들이 가시박 넝쿨 제거작업을 벌이고 있다. 생장이 빠르고 번식력이 강한 가시박은 나무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고 있어 식물계의 ‘황소개구리’로 불린다.

강씨는 작년 봄부터 가을까지 3~4차례 인부들을 고용해 가시박을 뽑았지만, 결국 100그루의 매실나무 중 10그루를 잃었다. "제초제를 뿌려도 며칠 지나면 또 넝쿨이 올라와. 거머리도 이런 거머리가 없어."

이날 오전 가시박 제거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강씨의 밭으로 이웃 김주현(55)씨가 걸어 들어왔다. "우리 옥수수밭도 좀 뽑아줘요."

김씨의 옥수수 밭(660㎡·200평)은 '가시박 거미줄'이 쳐진 것 같았다. 가시박이 어른 키보다 큰 옥수수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 온 밭을 뒤덮고 있었다. 김씨는 지난해 2만6400㎡(8000여평) 넓이의 밭에 옥수수를 심었으나, 그중 8000㎡(2500여평)에서는 전혀 소출을 내지 못했다. 가시박 때문이었다. 6.6㎡(2평)에 대략 30개의 옥수수가 나고, 작년 옥수수 30개 가격이 3000원 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씨는 작년 한 해만 가시박으로 인해 370여만원의 피해를 본 셈이다.

김씨의 팔에는 검붉은 점들이 박혀 있었다. 작년 가을 가시박 덩굴을 헤치며 옥수수를 따다 가시에 찔려 입은 상처들이다. 그는 "가을이 되면 가시박 열매 주변에 투명한 가시 수백 개가 붙는데, 한 번 찔리면 잘 빠지지 않아 피부가 붓고 고름이 난다"며 "가시가 옷과 장갑을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인부들이 가시박이 있는 밭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시박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주고 있다. 상중도에서 오이·고추 농사를 짓는 조연숙(69)씨는 "(가시박에) 가시가 달리는 가을에는 마실 나가기가 겁난다"며 "가느다란 가시가 바람에 날려 조금만 나갔다 와도 몸이 따끔거린다"고 했다. 조진구(55)씨도 "가을이면 가시에 찔릴까 봐 집 뒤 텃밭에도 잘 가지 못한다"며 "옷에 가시가 닿으면 그 옷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가시박 때문에 밭농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옥분(71)씨는 복숭아, 두릅나무 50여 그루를 가시박에 내줬다. 나무들은 이미 꼭대기까지 가시박에 휘감겨 있었다. "2주 전에도 한 번 뽑았어. 그런데도 이래. 어쩔 수가 없어." 남편 전원식(72)씨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이 밭에 개를 8마리쯤 키웠는데, 다 가시박 가시에 찔려 피부염을 앓았다"며 "그중 몇은 죽고, 나머지도 죽을 것 같아 팔아 버렸다"고 했다.

가시박의 확산과 이로 인한 농가 피해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가시박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2000년대 초부터 뚜렷해졌는데도 환경부는 올해 6월에서야 가시박을 '생태교란종'으로 지정했다. 농가 피해 규모는 아예 통계조차 없다. 환경부 관계자는 "가시박으로 인한 농민의 피해는 농림수산식품부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가시박은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환경부 소관"이라고 했다.

한국교원대학교 환경교육과 김기대(41) 교수는 "가시박은 10여 년 전부터 전국에 걸쳐 피해를 주는 대표 식물"이라며 "정부가 피해규모조차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립환경과학원 김종민(54) 연구원은 "가시박은 강을 따라 종자를 퍼뜨리기 때문에 강 하류 지역에서 아무리 제거작업을 해도 상류지역에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했다. 지자체들이 힘을 합쳐 강 상류 지역에서 하류 지역으로 순차적으로 제거 작업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