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미국 솔트레이크 시티는 은행 설립이 쉽기로 유명한 곳이다. BMW·볼보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 은행 자회사를 여기에 세웠고, 메릴린치·골드만삭스 등 증권회사도 마찬가지다.

간절하게 은행을 갖고 싶었으나 몇 차례 실패했던 월마트가 그 좋은 입지를 놓칠 리 없었다. 2005년 '근로자 대출 은행'을 설립 신청했다. "월마트가 은행 서비스를 하면 신용카드 수수료를 다른 은행이 가져가지 못하므로 그만큼 가격을 더 내릴 수 있다"며 어디까지나 소비자를 위한 전략임을 홍보했다.

점포를 낼 때마다 그러지 않아도 지역 상인들의 반대 운동이 심했던 터지만, 이때부터 안티 진영은 급팽창했다. 월마트 감시(Wal-Mart Watch) 같은 전국 조직이 탄생하고 선거 전문가, 유명 정치인이 안티 운동에 참가했다. 월마트의 횡포를 폭로하는 영화, 불매 운동을 부추기는 비디오, 책, 노래, 블로그가 쏟아졌다.

영화에는 영화, 광고에는 광고, 거물 출연에는 거물 영입으로 맞서던 월마트는 2년 후 신청서를 되찾아갔다. '매일 가장 싼 값으로'라는 소비자 우선의 경영으로 성공한 글로벌 기업으로서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절감한 채 물러서야만 했다.

주택가 골목 상권을 둘러싼 국내 유통업계의 다툼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유럽에서도 똑같은 갈등이 있었고, 일본에서도 실컷 보았다.

롯데, 신세계, GS, 홈플러스 등 재벌 계열사들이 주택가에서 경쟁적으로 대형 수퍼마켓을 개점하는 가운데 동네 수퍼들은 이를 막아달라고 정부에 쫓아다닌다. 대형 업체는 '소비자에게 이득이 된다'는 논리고, 소형 수퍼는 '재벌 수퍼가 들어오면 골목 수퍼는 다 망한다'고 흥분한다.

국회에는 재벌 수퍼를 제한하겠다는 법안이 여럿 제출됐으나 제대로 통과된 법은 하나도 없다. 월마트가 사원들 이름으로 공화당에 후원금을 쪼개 내듯 보이지 않는 로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골목길 수퍼를 둘러싼 싸움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쪽은 소비자 권리와 일자리 창출을 앞세운 전형적인 시장 논리다. 반대편은 죄 없는 서민을 죽이지 말라는 식으로 다분히 감성적인 항변이다. 이쪽이 자본주의 사회의 스타인 대기업들이 강하게 단합된 진지를 구축했다면, 저쪽은 후퇴하는 군대처럼 산발적으로 불평불만의 목소리만 높일 뿐이다.

두 진영이 힘으로 대결하면 결과는 뻔하다. 자본력이 튼튼한 소수가 흩어져 있는 다수를 벼랑 끝으로 밀어낼 것이다. 여론 형성 능력도 '샴푸 하나 사면 덤으로 하나 더 드릴게'라고 아줌마 소비자에게 사근사근 접근하는 쪽이 어정쩡한 수퍼 아저씨 세력을 압도할 것이다.

이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나 정부와 정치권이 개입, 중재를 섰다. 일본도 한동안 초대형 수퍼 개점을 방관하다가 이제는 많은 지방 자치단체들이 교외에만 허용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나라마다 다르게 재벌형 수퍼 개점을 막고 24시간 영업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생계형 자영업자들이 올 들어 속속 실업자로 몰리고 있다. 1분기에만 54만 자영업자가 문을 닫았다. 세계적인 MBA 코스에서 마케팅의 성공 모델로 꼽히는 회사가 한국에서 탄생했지만, 그 회사의 점포가 개설될 때마다 그 그늘에서는 수십, 수백의 자영업자들이 가게 셔터를 내렸다.

만약 재벌 유통회사들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졌다면 '소비자가 원하는 일'이라는 논리 뒤에 탐욕을 감출 일이 아니라, 먼저 골목 수퍼와 공존하는 길을 찾아봐야 한다. 싼값에 상품을 조달할 구매 파워가 강하다면 그 힘을 골목 수퍼를 도와주는 데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적인 가전회사 필립스는 최신 LED 조명등을 15달러가 되지 않는 값에 팔고 있다. 남기는커녕 손해 보는 품목이지만 아프리카 빈민촌 어린이들에게는 절실한 상품이다.

국내 휴대폰 업계는 여러 기능이 혼합된 값비싼 제품에 주력하고 있지만, 노키아는 5달러 이하의 초저가 제품까지 만든다. 과거 이장 집 전화를 온 마을 사람이 공동 사용했듯, 인도 오지에 동네 공용 휴대폰을 값싸게 제공하는 회사도 노키아다.

책상 앞에는 인터넷 쇼핑몰이고, 왼쪽으로 몇 발짝 걸으면 편의점이며,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대형 쇼핑센터다. 이대로 놔두면 시장 논리로 승리한 강자(强者)의 찬란한 간판만 남고 올망졸망하던 골목 수퍼의 불빛은 거의 꺼지고 말 것이다. 잔인한 쇼핑 지도가 아닐 수 없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연말에 불우 이웃돕기 성금을 몇억 던지고 비싼 점퍼 차림으로 달동네에서 한나절 연탄 나르기를 해준 것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