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차 난다 카믄(하면) 사람들이 놀라요. 나를 더 어리게 보는 사람도 있어요."(이준희)

"그라지 마이소. 행님하고 같이 늙어가기 싫다 아입니꺼."(이만기)

'왕년의 천하장사' 이만기(46·인제대 교수)와 이준희(52·건강식품 사업)가 지난 19일 여의도에서 만나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티격태격 수다 보따리를 풀었다. 1980년대 한국 씨름의 양대 산맥인 두 사람은 서로를 '준희 행님', '만기야' 하고 불렀다.

이만기(왼쪽)와 이준희는 1980년대 초·중반 한국 씨름의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다. 비슷한 스타일로 서로 모래판에 눕히던 두 사람은 아직도 씨름판 최고 라이벌로 꼽힌다.

씨름판 뒤엎은 이만기

두 사람의 시곗바늘은 제1회 천하장사대회(1983년 4월 14일) 준결승전으로 되돌아갔다. 이날은 이준희와 이만기의 세 번째 대결이었으나, 당시 최강자였던 이준희(당시 일양약품)는 이만기(경남대)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만기는 무명이었고 앞선 대결 두 번도 이준희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기 때문이다. 반면 이만기는 이준희를 존경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행님은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높았어요. 나와 (강)호동이 관계랑 같았지."(이만기) "나는 그때만 해도 이만기가 누군가 했지."(이준희)

하지만 당시 20세의 이만기는 '하늘 같던' 이준희에게 첫 판을 진 뒤 내리 2판을 따내며 결승에 올랐고, 초대 천하장사까지 거머쥐었다. "이긴다는 건 상상도 못했죠. 그래도 행님(1m88· 110㎏)보다 작은 내(1m83·92㎏)가 이기는 바람에 씨름 인기가 높아졌어요."(이만기) "만기가 우승하면서 씨름판 판세가 완전히 거꾸로 됐죠. 기존 스타들이 만기를 쫓아가는 신세가 됐어요."(이준희)

이후 두 사람의 경쟁 구도가 한동안 이어졌다. 이만기는 천하장사 10회, 한라장사(85.1㎏ 이상) 7회, 백두장사(95.1㎏ 이상) 18회를 차지했고, 이준희도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7번을 차지하며 모래판을 양분했다.

모래판을 떠난 두 천하장사 이준희(왼쪽)와 이만기가 샅바가 아닌 바지춤을 서로 잡 았다. 한국 씨름 전성기를 양분했던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강호동·최홍만 무섭지 않아

상대 전적은 14전 10승4패로 이만기가 우세했지만, 이만기 교수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이준희 선배였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화려한 기술부터 힘으로 버티는 장기전까지 모든 종류의 씨름을 구사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준희 행님은 강했어요. 키 크고 몸 부드럽고 기술 좋고…. 다만 독한 근성이 좀 부족해서 파고들기 좋아하는 제가 많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준희씨는 "만기는 빠르고 기술 좋고 꼬롬한데(영리한데) 갈수록 힘까지 세지니깐 완벽해지더라"고 했다.

이들에게 '같은 시대에 강호동·최홍만이 있었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아마 우리와 필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강호동과 최홍만은 강한 힘에 들고 메치는 게 좋았지만, 기술이 다양치 못하고 장기전에 약했다"는 평이었다.

이준희는 1987년 13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뒤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30세 나이였다. 그는 "후배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상에서 관두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13대 대회 때 8강에서 떨어졌던 이만기는 "선배 은퇴 소식을 듣고 까다로운 상대가 사라졌다는 생각만으로 기뻐했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4년 뒤인 1991년 이만기 역시 은퇴의 길을 선택했다. 19세의 강호동에게 패한 지 2년 뒤였다.

씨름 걱정하는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인 두 사람은 서로 바빠 만나지는 못해도 전화 통화는 자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두 아들의 필리핀 유학으로 '기러기'가 됐고, 이준희씨는 주말부부이다. "나만 만날 행님한테 전화한다 아잉교."(이만기) "원래 동생이 전화하는기라. '행님이 죽었나 살았나' 알아봐야지."(이준희)

옥신각신하다가도 한국 씨름의 장래 얘기가 나오자 두 사람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은퇴 후 일양약품과 LG증권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이준희씨는 "지금 씨름은 '절름발이 씨름'이야. 지지 않는 법을 배운 거인들만 있고 화려한 기술씨름이 없다"며 "그래서 팬들도 재미를 못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이만기 교수는 "씨름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씨름협회도 변화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두 사람의 걱정은 "씨름을 하겠다는 초·중학생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에 모아지고 있었다. "10년쯤 지나 봐요. 다들 어렸을 때 축구·야구하고 자랐다는 얘기만 할 겁니다. 누가 재미도 없는 씨름을 하려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