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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은 청계동을 떠나기에 앞서 아우 정근과 공근을 불렀다. 그때 정근은 나이 스무 살로 신천 만석지기의 딸 이정서(李貞瑞)와 결혼하여 청계동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있었고,열여덟이 된 공근도 칠팔 년 익혀온 한학(漢學)을 밀치고 서울과 신학(新學)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으나 아직은 청계동에 머물러 있었다. 두 아우가 오자 중근이 당부했다.

"아무래도 시절이 심상치 않다. 더는 청계동에 숨어 일문을 온전히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게 되었다. 세월과 함께 변화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나는 당분간 서울에 머물며 변화를 살펴볼 작정이다. 이제 너희들도 붉은 저고리 입은 아이들이 아니니, 내가 없는 동안 이 청계동을 지키고 집안을 돌봐다오. 특히 아버님을 잘 모셔라. 이제 아버님은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조차 '청계동 와주(窩主)'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예전의 그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해가 바뀌기 전에 서울로 떠나려 하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조마리아가 중근을 불렀다. 여자라도 안태훈 못지않은 기백을 지녀 치마 두른 군자라는 별호를 듣던 조마리아였으나, 그녀도 격정에 휩쓸려간 지난 세월에 시달린 탓인지 갑자기 늙고 지쳐 보였다.

"네 아버지한테서 얘기는 들었다. 당분간 서울에 머물게 될 것이라니, 아무리 어미라 하나 사랑에서 내리는 결정을 어찌 간섭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일러둘 게 하나 있다."

"무슨 일인지요?"

일러스트 김지혁 <a style="cursor:pointer;" onclick="window.open('http://books.chosun.com/novel/lmy/popup.html','se','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no,menubar=no,scrollbars=no,resizable=no,copyhistory=no,width=1100,height=710,top=0');"><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tn_view.gif" border="0" align="absmiddle"><

자신의 하는 일에 좀체 참견하지 않는 어머니가 일껏 불러 하는 말이라 중근이 그렇게 물었다.

"현생(賢生) 에미에게 다시 태기가 있는 모양이다. 저번에도 너 없이 낳아 길렀는데, 이번에 또 네가 서울에 나가 있게 된다니, 현생 에미가 의젓한 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안됐구나. 이번에는 함께 데리고 가면 아니 되겠느냐?"

"간다고 해서 아주 가는 것도 아닐뿐더러, 가고 오는 날이 기약 되지 않은 길입니다. 거기다가 어린것까지 딸린 잉부(孕婦)를 어찌 데려간단 말입니까? 한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어 사구고(事舅姑:시부모를 섬김) 접빈객(接賓客:손님을 접대함)도 함부로 팽개쳐서 안 되는 본분일 것입니다."

중근은 한마디로 그렇게 잘랐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썰렁한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았다. 중근의 상무적인 기질과 밖으로 나도는 습성 때문에 위기를 맞았던 부부의 정은 천주교 귀의를 통해 새롭게 되살아났지만, 워낙 분주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아버지 안태훈이 주목받고 쫓기는 동안 맏이로서 그 몫을 대신해야 했던 중근은 청계동에 지긋이 머물러 있을 틈이 없었다. 어머니 조씨 말대로 맏딸 현생은 중근이 교우들의 송사를 도맡아 서울을 드나들 때 태어났고, 한번 제대로 얼러보지도 못한 동안에 벌써 세 살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 중근이 아내 아려에게 술상을 청해 호젓이 마주 앉게 된 것은 아마도 어머니 조마리아의 그런 깨우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근이 원래 그리 다사한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슴속의 정감을 드러내는 데도 능숙하지 못했다. 한식경이나 말없이 술잔만 비우다가 불쑥 말했다.

"이슬과 같이 허무한 이 세상에 당신과 나는 귀한 부부의 인연을 맺었소. 허나 시절이 다난하여 한번 제대로 정분을 나누지도 못하고 무망한 세월만 축냈소. 그러다가 천주와 성모의 은총을 입어 다묵(多默:토마스)과 아녜스(아그네스)로 다시 태어나 새 세상을 기약하게 되었소. 이제 우리를 합친 것은 천주 야소이니 사람이 나눌 수는 없소. 우리는 저 세상토록 함께 갈 것이오. 다만 한 가지, 현생이도 그러하거니와 이제 태어날 아이도 천주 야소의 점지일 것이오. 만약 이번에 태어나는 아이가 현생과 달리 남아라면 나는 그 아이를 천주께 바치고 싶소. 그 아이에게는 가문과 겨레의 짐을 모두 덜어주고 오직 천주께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해주고 싶소."

그러자 아려가 두 눈을 들어 가만히 중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따르겠다는 뜻을 전하는 것을 대신하고 다시 그림자처럼 곁에 머물러 앉아 술잔을 비우는 중근을 지켜보기만 했다. 중근은 그로부터 사흘 뒤 서울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