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대우는 속을 알 수 없는 회사다. 바로 얼마 전까지 수출 실적 좋고 이익 많이 난다고 자랑했다. 노사 화합이 잘 되는 회사로도 꼽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두 번 부평공장을 방문, 모범 사례로 치켜세웠다. 그러던 것이 돌연 부실회사 리스트에 들어갔고, 구제금융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디트로이트 본사가 무너지는 위기에서 부평의 공장인들 어쩌겠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본사와 GM대우는 별도 법인이고, 본사가 적자에 허덕일 때도 이곳에서는 콧노래를 불렀다. 회사측은 외환 손실이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무슨 꿍꿍이인지 28% 지분을 가진 2대 주주 산업은행조차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힌트는 GM의 독일 자회사 오펠이 암시하는지 모른다. 독일 정부는 자금 지원에 앞서 GM본사와 오펠공장 사이에 불평등 계약이 맺어졌음을 밝혀냈다. 본사를 위해 해외 법인이 희생하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GM대우 노조가 본사 자금난 해소에 이익금이 빠져나간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큰 위기를 겪으면서 투자자들이 알게 된 진실 중 하나가 글로벌 기업의 회계 장부를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 참모습을 알 수 없다. 공개된 장부는 과학적으로 포장됐으나 그 속은 깜깜한 블랙박스다.

거기에는 허위 통계와 위장 계약서가 뒤죽박죽 섞였다. 소수점 이하 수치까지 세밀하게 적어놓았으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암호투성이뿐이다.

족집게라던 분석가(애널리스트)도 리먼 브러더스의 장부를 잘못 읽었다.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간 폭탄이 터진 후에야 투자자들은 핵폭탄이 거기에 숨어 있었음을 알았다. 앞에서는 구제 금융을 받아간 AIG가 뒤에서는 임직원에게 그렇게 많은 보너스를 주겠다고 계약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투자자들이 땅을 칠 일은 국내서도 벌어졌다. 어느 재벌이 세계적인 중장비 회사를 품에 안았다고, 그래서 글로벌 그룹으로 성장한 듯 홍보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다. 인수를 지휘했던 3세 경영인은 월 스트리트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마술사인 듯 언론에 등장했었다.

인수할 때 투입한 자기 돈은 몇 푼 안 되고 다른 곳에서 많은 부채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요즘에야 상세히 밝혀졌다. 자금을 보태준 파트너들과 이런저런 이면 계약을 맺은 사실도 뒤늦게 드러나는 모양이다.

기업 인수전에서 '타고난 승부사'란 빚을 잘 끌어오는 오지랖의 사이즈에 불과했다. 거기에 뒷거래 내용을 잘 감추고서 그 거래 내용을 '첨단적 금융 기법'이라든가, '아시아 최초의 시도'라며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능력까지 있다면 스타 연금술사로 언론의 조명발을 받게 된다.

큰일 벌이는 데 부채 한 푼 없이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지렛대를 쓰면 작은 힘으로 큰 바위를 옮길 수 있듯이, 외부 부채를 잘 활용하는 것이(소위 leverage) 큰돈 버는 지름길이라는 논리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래 내역을 다 공개하지 않고 중요한 약점일수록 감추는 행태다. 순진한 투자자들은 난수표 같은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그 회사 주식과 채권을 사야 한다. 주가가 폭락한 후에야 '그런 계약이 있었던가'고 항의하지만, 이미 허망한 뒷북치기다. 앞으로 글로벌 기업이 많아질수록 투자자들이 일방적 피해자로 둔갑할 소지는 높아질 것이다.

어느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고백했다. "예를 들어 브라질 현지공장이 넘어지면 도산 직전에야 보고를 받는다. 수백억원 손실이 나더라도 문책이 두려워 보고하지 않아 나중에 수습하기 힘들다." 해외 영업이 많다 보면 큰 위험이 닥쳐와도 본사에서 파악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회사 안에서도 알기 어려운데, 회사 밖 투자자들은 어떻겠는가. 애초부터 경영진과 투자자는 불평등한 관계다. 같은 높이의 땅바닥에서 진검 승부하는 대등한 위치가 아니다. 저쪽은 첨단 기법과 혼을 뺄 만한 홍보 전술로 무장한 데다 속을 알 수 없도록 복면(覆面)까지 쓰고 덤비는 반면, 투자자들은 모기 한 마리 베기 힘든 칼을 들고 있는 셈이다.

요즘 대형 금융지주회사와 재벌들이 헤지펀드·사모펀드를 줄지어 만들고, 금융업을 확장하고 있다. 누구 돈인지, 주주가 누구인지 얼굴을 알 수 없는 외국 펀드도 속속 들어온다. 그럴수록 그들의 회계장부는 더 복잡한 암호로 조합되고, 출입구를 구별하기 힘든 미로(迷路) 속으로 투자자를 유혹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글로벌 기업일수록 공시(公示) 내용을 지금보다 훨씬 상세하게 하도록 법을 고쳐야 한다. 외국계 펀드와 사모펀드에도 경영 공개를 의무화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초대형 참사를 일으킬 '한국산 리먼'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