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에게 서울 광화문은 국가의 상징이다. 그는 수도를 빼앗기는 아픔을 적도(敵都)에 가장 먼저 진입하 는 것으로 갚았다. 차량만 1000대를 끌고 북진한 미군과 달리 차량이 150대에 불과했던 그의 국군 1사단은 밤을 새워 행군하며 앞질렀다.

나는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 백선엽(白善燁)이다. 59년 전 6월은 잔혹했다. 북한의 기습으로 병사들은 폭우 맞은 볏단처럼 쓰러졌다. 나의 사단(師團)은 개성을 잃었고 문산을 잃었고 파주를 잃었다. 나흘을 꼬박 굶은 나는 미군 중위에게 얻은 설탕 한줌을 물에 타먹고 패주(敗走)했다.

길은 고달팠다. 시흥에서 용인을 거쳐 오산~괴산~속리산을 넘어 상주까지 후퇴하는 사이 말라리아균은 수시로 몸을 괴롭혔다. 북한은 전차와 대포와 전투기를 갖고 있었다. 국군은 맨주먹이었다. 병사들은 수류탄을 안고 전차 밑으로 기어들었다. 그들의 찢긴 몸을 밟고 붉은 군대는 행진했다.

그해 8월 나라의 운명이 외줄기 낙동강에 걸려 있었다. 전선(戰線)의 붕괴는 곧 '대한민국'의 붕괴를 뜻했다. 다부동(多富洞)에서 나는 말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대한 남아로 다시 싸우자.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1950년 8월18일 밤부터 23일까지 나의 사단은 북한군과 7차례 맞붙었다. 국군 2300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1282명이 전사했다. 북한군은 5690명이 죽었다. 군인의 자리를 청년학도들이 메웠다. 주민들은 탄우(彈雨) 속에 지게로 보급품을 날랐다. 궤멸한 것은 조국이 아니라 김일성의 군대였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진(北進)이 시작됐다. 그 대열에 국군은 제외돼 있었다. 밀번 미1군단장 앞에서 나는 울었다. "평양공격에 국군이 빠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걸어서라도 평양에 제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대동강 물 어디가 깊고 얕은지 다 압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21군단장으로 알사스 로렌 공격전에서 용맹을 떨친 밀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제너럴 백, 차량 150대로 어떻게 선두에 서겠는가." 그랬다. 나의 사단은 미군의 소총과 박격포와 대포와 지프와 전차를 빌려 북으로 향했다. K레이션도 미군에게 얻어먹었다.

1950년 10월19일 오전 10시50분, 약속대로 국군 1사단은 평양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한 달 뒤 UN군은 중공군(中共軍)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와 진격을 거듭해야 했다. 피리에 북에 꽹과리에, 그것도 모자라 '싸(殺) 싸'하는 중공군의 함성을 나는 지금도 듣고 있다.

세상이 편안했다면 59년 전 나의 기억은 먼지 쌓인 전사(戰史) 속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에 덮인 만장(輓章) 속에 갈라진 국론과 한반도 상공을 맴도는 북한의 미사일은 89세 노병(老兵)의 쇠약해진 몸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4층 집무실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

지난 2일 나는 전쟁기념관 벽에 새겨진 전우 김백일 장군의 이름을 쓰다듬고 출근했다. 그는 함께 월남했다 대관령에서 사망했다. 그날 낮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 번개가 우르릉거릴 즈음 내가 전선에 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기자 한 명이 찾아왔다. 기자는 자신의 휴대폰에 '북한, 중거리 미사일 발사 준비'라는 속보(速報)가 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떠는 것은 북한에서 터진 지하 핵실험의 격진(激震) 때문입니까, 아니면 체제를 위해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운명 때문입니까"라고 내게 물었다.

―북한에서 미사일이 벌써 몇 발째 발사되고 있는데 우리는 둔감합니다.

"좌파정권 10년 동안 안보 의식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지요."

―북한이 개발한 핵을 두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차피 통일이 되면 우리 것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말이 안 되지요. 북한은 일관되게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북한의 공산당 헌장에도 일관되게 나와 있어요. 그 사람들은 남한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정이 이렇게 변했다면 우리도 핵을 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단은 미국의 핵우산이 있지요. 우리가 핵을 개발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흠…, 제가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대동강 다리에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평양 탈환작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당시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가능성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요. 북한은 당시 탱크가 300대에 전투기도 200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정(射程)거리가 긴 대포도 1200문이나 보유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고 전투기도 없었어요. 대포도 대포라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6·25는 기습(奇襲)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군은 60만 대군이지요."

―60만 대군이 있어도 후방에서 국론이 분열되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국론이 통일돼야지요. 예전에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당군의 승패가 거기서 갈렸지요. 하지만 59년 전과 달리 지금은 세계가 북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군은 정의(正義)의 군대입니다. 얕볼 수준이 아닙니다."

―만일 저희가 생각하는 이상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고 굴욕도 참을 수 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참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이지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지금처럼 국론이 갈려 있었습니까.

"갈려 있었지요. 해방 전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수가 200개가 넘었습니다. 군사단체만 30개였어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일치단결했지요. 우리 국민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북한이 진짜로 도발한다면 장군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가 싸워야죠!"

―국내외 사정이 엄중한 상황입니다. 전(前) 정권에서 추진한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전시작전통제권을 날짜를 박아 우리가 인수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장차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지금은 정세가 유동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작권을 가져오면 우리가 져야 할 예산상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전작권을 가져오면 자주국방이 되는 것 같은 면만을 보는 데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느냐는 문제는 별개의 차원입니다."

―전작권 문제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건 있습니까?

"1000만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지요. 정부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야 할 겁니다."

―일각에서 현재의 국방부 핵심들이 전 정권 밑에서 전작권 이양문제 실무를 맡았기 때문에 망설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전 정권에서 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 개인인데 후배들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안보의식이 약해졌다는 말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군에 입대해서도 '왜 내가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삼아야 하나' 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6·25 북침설(北侵說)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요.

"일단 군인이 된 사람은 국가방위가 최고의 목표가 돼야지요.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지금 젊은이들이 과거와 달리 많이 깨어있다고 봐야지요. 그건 군 지휘관의 통솔과 교육에 의해 극복돼야 합니다. 6·25 북침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군도 군이지만 각급 학교에서의 안보교육도 소홀해졌지요.

"북한은 아직도 아침부터 공산당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안보교육도 강화돼야 합니다."

―미군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강입니다. 그런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장군이 백 장군이라고 들었습니다.

"존경하는지는 알 수 없고 미 8군이 매년 각급부대별로 저를 초청해 강의를 듣기는 합니다. 미 장성 진급자들이 가입하는 '캡스턴 그룹'이라는 게 있지요. 그들도 매년 초 해외 연수프로그램의 필수코스로 전쟁기념관 내 사무실을 예방(禮訪)합니다. 미 국방부 아시아 담당 직원들도 매년 50~60명씩 찾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매일 아침 서예를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최고로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왜 미국이 자기들이 도운 조그마한 나라의 퇴역(退役) 장성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보좌관 이왕우 중령은 "한미동맹의 역사와 역대 한미연합사 인맥을 백 장군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백 장군과 함께 싸운 전우들은 그 후 미 8군 사령관과 한미 연합사령관을 지냈고 백 장군의 이름이 선배에서 후배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그런가요.

"….(보좌관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끼어들어 "장군님, 이제 그 이야기를 해도 되잖아요" 라고 했다.)

―섭섭한 일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허허…. 가장 아쉬운 건 6·25 50주년인 2000년 6월입니다. 당시 제가 6·25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UN 참전용사를 초청했습니다. 전쟁 때 큰 부상을 당한 용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크게 실망시킨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실망했습니까.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출발해 남대문~시청 앞까지 도보(徒步)로 행진하는 계획이 갑자기 취소된 겁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이 나라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걸 보여주면 그분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실망으로 바뀐 거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요.

"6·25 며칠 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을 했잖아요. 그 회담 직후 돌연 취소 지시가 내려온 거죠. 그때 비용도 엄청나게 들었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해외 참전 용사들 얼굴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백 장군이 2007년 현충일 기념식에 불참한 일도 있었지요.

"2006년에 험한 일을 겪은 다음입니다.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서 기념식이 있었는데 대통령 주위로 삼부 요인과 정치인들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 한미 연합사령관, 미 8군 사령관과 미군 장성들, 한국군 원로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정치인들하고만 악수를 하고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없었지요. 군 원로들과 미군 장성들의 당혹해하는 표정을 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6·25 참전 용사와는 손을 잡기 싫었다는 거겠죠."

―당시 기분이 어땠습니까.

"말하기도 싫어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한국군 원로와는 악수를 안 해도 괜찮습니다. 싫은데 어떻게 손을 잡겠습니까. 그렇지만 미군 대표와는 그러면 안 되죠. 그 나라의 젊은이 4만명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싫어도 예의를 표해야죠. (이왕우 중령은 "좌파정권 때 백 장군을 초청한 우리 군부대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월 2~3회씩 강연을 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해 현충일 기념식에 불참했나요?

"2008년 새 정부 출범 이후 갔지요. 처음부터 유심히 지켜봤는데 참모들이 무조건 전(前) 정권과 반대로 하라고 코치를 했는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요."

―과거 정권 때 맥아더 원수의 동상 파괴시도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자기 나라를 구해준 은인에 대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맥아더 장군을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제일 존경하는 군인이 맥아더 장군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나흘 만인 29일 그가 수원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에 북한의 야크기가 날아다닐 때였어요.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 둑에서 정찰을 했고 미군 파병을 미국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만일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으면 낙동강에서 우리가 버텼어도 앞날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욕하는 건 할 수 없고요, 미군 사이에서도 맥아더를 두고 '거만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전혀 거만하지 않던데요."

―평남에서 태어났지요. 동생이 6·25때 함께 참전한 백인엽(白仁燁)장군입니다. 형과 동생의 군번은 54번과 27번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군의 군번 1번은 이형근(李亨根), 2번은 채병덕(蔡秉德), 3번은 유재흥(劉載興), 5번이 정일권(丁一權) 장군이었습니다. 제가 군사영어학교 개설 멤버였는데 당시 재학생 200명 가운데 110명이 임관됐습니다. 대장까지 오른 사람이 8명, 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 13명,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사람이 7명이니 건군(建軍)의 주역이라고 봐야 하지요. 다만 군번 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육군 중위로 복무했지요. 백 장군과 관련해서 만주군관학교 출신임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도 '백 장군이 만주군 장교 시절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내용이 올라와 있습니다. 좌파에서는 보통 원로들을 그런 식으로 폄하하지요.

"하하, 저는 독립군과 한번도 교전해본 적이 없어요. 북한 김일성 부대를 독립군이라고 하는데, 북한 김일성은 독립군이 아닐 뿐더러 제가 장교로 임관됐을 때 김일성은 이미 소련 하바로브스크로 몸을 피한 다음이었어요.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합니까."

―백 장군이 군 창설 이후 좌익 척결을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하는 과정에서 당시 좌익으로 몰렸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구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공개석상에서 고 박 대통령 이야기는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분 자제들이 있는데 제가 공연한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박 대통령이 백 장군을 뭐라 불렀습니까.

"백형이라고 했지요. 나이는 박 대통령이 저보다 세 살이 위지만(1917년생) 군에서는 제가 선배였으니까요."

―백 장군의 기록을 읽다 보면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이 다 등장하더군요. 북한 김일성은 필생의 앙숙이었던 것 같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맨 먼저 진주했을 때 김일성을 잡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그때 김일성은 이미 압록강 근처로 내빼고 없었지요.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 가보니 텅 비어있더군요.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본 적은 있습니다. 김책(金策)을 바로 인근에서 쫓아본 적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군했을 때 중공군을 처음 봤지요.

"영변 농업학교에 사령부를 차렸을 때였어요. 이상한 포로를 하나 잡아왔는데 제가 직접 신문해보니 중국인이었어요. 고향이 저 멀리 남쪽에 있는 해남도(海南島)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변 농업학교 주변 산에 전부 중공군이 매복해 있었던 겁니다."

―후퇴했습니까.

"그냥 밀려나지는 않았지요.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으니까요."

―그후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을 했습니다.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뭡니까.

"당시 낙동강에서 붕괴된 북한군의 주력은 양 갈래로 나뉘었어요. 일부는 태백산 줄기를 타고 북으로 후퇴했고 2만~3만명이 지리산에 은거했지요. 제가 수도사단과 8사단을 이끌고 3~4개월 대소탕전을 폈습니다. 제일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민폐를 줄일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참혹했던 역사를 지금은 모두가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외침을 많이 당한 게 바로 그런 망각 증세 때문이 아닐까요.

"외침 부분은 지정학적 요인도 있는 것이고, 제가 지금 하고 싶어도 우리 내부의 좌우대립을 말하기는 그래요. 나라의 원로라지만 늙은 녀석이 불필요한 소리를 해서 나라의 분열을 조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왜 우리 민족은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습니다.

"우리 민족은 위대한 국민입니다. 6·25 때 보니 단결해서 외침을 막던 데요. 저는 이 국민을 가지고 전쟁에서 이겨봤습니다. 목숨을 버려도 아무 보장이 없던 시절에 우리 국민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피를 흘렸습니다. 한마디로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정신이지요. 지금 잠시 소란이 있어도 저는 우리 국민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국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