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스물여덟 살 독일 저널리스트 루돌프 차벨(Rudolf Zabel)은 일본을 향해 떠났다. 중국 의화단 사건을 취재한 적 있는 극동 전문기자인 그는 러일전쟁을 취재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스무 살 처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그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겸한 취재여행을 떠난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지만 전장(戰場)으로 가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일본 당국은 취재 허가를 계속 미루고 있었다. 차벨은 기다리는 동안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한다. 부산에서 2주간 머문 뒤 기선(汽船)을 타고 다시 원산으로 갔다. 신혼부부는 원산에서 보름가량 있다가 안변·평강·철원을 거쳐 서울까지 여행했다.

벽안(碧眼)의 젊은 저널리스트가 본 한국인은 게으르고 탐욕스러우며, 거칠고 아둔한 사람들이었다.

1904년 무렵 냇가에 모여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한국 아낙네들의 모습.

"한국인들은 거래에서 매우 좀스럽기로 유명했다. 말은 많은데다 몇 푼을 두고 맹수처럼 싸웠고, 엽전 세 닢을 받아내기 위해 기꺼이 사흘을 허비했다. 이들은 지극히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술 취한 한국인이 길거리에 누워있는 모습은 흔한 구경거리였고, 여자문제로 살인이 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라고 했다. 보다시피 평균적인 한국인의 모습은 그다지 유쾌한 게 아니었다."

그가 본 한국의 옛 모습이 지금 우리가 볼 때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단순히 제국주의자의 시선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는 문화상대주의적인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시골 아낙네를 보고 이렇게 쓴다. "맨살을 드러내는 일이 무조건 예절 감각에 어긋난다고 역설하기도 곤란한 노릇이다. 예절 감각이란 것도 일차적으로는 풍습과 유행의 산물인 만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똑같은 예절 감각을 기대할 수는 없다. 유럽만 하더라도 유행에 크게 좌우되는 게 바로 이 예절 감각이다."

드물지만 한국인의 우수함을 칭찬하는 부분도 있다. "개울물을 이용해 논에 물을 대는 이 마을 주민들의 솜씨는 실로 대단했다. 감탄할 만한 관개시설이 아닐 수 없었으니 한국 농부들의 부지런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저널리스트로서 날카로운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은 '한국 독립의 역사'라는 제목을 붙인 마지막 장이다. "중국·일본·한국 등 동아시아 문명 삼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예의 그 낡은 거짓말을 내세워 한국 땅에서 제멋대로 활개를 치게 되었다" 같은 인식은 저자가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한 노력을 엿보게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을 찾은 서양인의 기록은 여럿 있지만, 단순한 감상에 앞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려 한 태도를 높이 평가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