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세 번째 전직 대통령 소환조사로까지 이어졌던 검찰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드라마는 노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으며 막을 내리게 됐다.

비극의 시발점은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불렸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와 국세청의 고발로 시작된 대검 중수부의 수사였다. 국세청의 특수부로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지난해 11월 말 4개월간 박 전 회장에 대한 집중적인 세무조사를 벌여, 박 전 회장이 홍콩에 APC(Asia Pacific Company)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6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했고, 이 과정에서 200억원대 세금을 포탈한 사실을 적발해 검찰에 고발했다.

국세청의 바통을 이어받은 검찰은 박 전 회장의 조세포탈 혐의 확인을 거쳐 지난해 12월 12일 박 전 회장을 구속했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의 구속은 또 다른 수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박 전 회장의 신병을 확보한 검찰은 그가 조성한 비자금 600억원의 행방 찾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박 전 회장의 입 열기에 나선 지 며칠 만에, 수사팀도 깜짝 놀랄 만한 진술이 박 전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박 전 회장은 당시 검사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전(前) 정권에 돈을 줬다"는 말을 먼저 꺼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정권'이 누구를 지칭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이 이어지자, 박 전 회장은 2007년 6월 말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청와대 관저(官邸)로 미화(美貨) 100만달러가 담긴 돈가방 2개를 전달한 것과 2008년 2월 22일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 연철호(36)씨의 홍콩 계좌로 비자금 500만달러를 송금했다는 것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당시 박 전 회장의 진술은 "100만달러는 노 전 대통령이 달라고 해서 줬고, 500만달러는 노 전 대통령 요청으로 '애들(노 전 대통령 아들 건호씨와 조카사위 연씨 지칭)'에게 줬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들은 당시 박 전 회장이 왜 이 같은 '핵폭탄 진술'을 조사 초기에 스스로 던지고 나왔는지 아직도 의문이라고 말한다.

검찰 일각에선 "박 전 회장이 '당신들이 과연 수사할 수 있겠느냐'며 엄포를 놓은 것"이라는 관측도 하고 있다. 전·현 정권 간의 정면 충돌로 번질 수 있는 폭발력 때문에 검찰이 쉽사리 수사착수 결정을 내리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검찰은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결정하고, 600만달러 전달과정의 퍼즐 맞추기에 들어갔다.

검찰은 박 전 회장의 심복인 정승영 전 정산개발 사장 등 박 전 회장 회사 관계자들을 소환조사 하면서 은밀하게 수사의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2월 검찰 정기인사로 대검 중수부 수사팀이 재편되면서 수사는 더 속도를 붙였다. 이인규 중수부장(검사장)을 필두로 한 수사팀은 홍콩 사법·금융 당국과의 공조를 통해 박 전 회장 비자금 계좌인 APC 계좌 돈 흐름을 추적하는 등 노 전 대통령 혐의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검찰은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수사인 만큼, 최대한 철저한 확인작업을 거쳐 5월쯤 본격적인 관련자 소환에 들어간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혐의가 3월 말~4월 초 언론에 속속 공개되면서 수사 스케줄이 급변했다. 검찰은 4월 6일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집사'였던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전격 체포하면서, 사실상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공개수사에 돌입했다.

같은 달 10일에는 조카사위 연철호씨, 11일에는 권양숙 여사, 12일에는 아들 건호(36)씨가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수세(守勢)에 몰린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글을 올려 "연씨 계좌에 입금된 500만달러는 퇴임 이후 알았다. 특별히 호의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순수한 투자라고 생각해 문제 삼지 않았다"고 반격에 나섰다.

정 전 비서관이 체포된 직후엔 "정 전 비서관의 혐의는 저희들의 것이다. (100만달러는 나는 몰랐고) 저의 집(권양숙 여사)이 요구해서 받은 것으로 빚을 갚는 데 사용됐다. 중요한 것은 증거"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 전 비서관이 12억5000만원 국고(國庫·대통령 특수활동비)를 횡령하고, 2006년 회갑 때 박 전 회장이 시가 2억원 상당의 피아제(Piaget) 시계 세트를 선물한 사실까지 공개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홈페이지 폐쇄를 선언하면서, "나를 버려달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국민에게 사죄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4월 30일 검찰에 출두한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박 전 회장과의 대질신문을 거부했으며, 조사 내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검찰 관계자들은 전한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회장과 잠깐 조우했을 때 "나도 박 회장처럼 곧 파란 옷(수의·囚衣)을 입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박 전 회장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나온 얘기로, 그때까지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소환조사가 끝난 뒤에도 딸 정연(34)씨가 뉴저지 고급아파트를 구입하고 박 전 회장에게 40만달러를 추가로 받아 집값을 치른 사실 등이 속속 드러나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진행형' 상태가 계속됐다. 검찰은 추가 수사를 이유로 노 전 대통령 신병처리(영장 청구 여부) 결정을 20일 가까이 늦췄다.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여론의 지탄이 계속되면서,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한 법조계 인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노 전 대통령 성격상 뭔 일을 내겠다.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나겠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이 인사도, 검찰도, 국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