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인천취재본부장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의혹 사건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법원 사태는 사법 행정권의 범위와 한계, 사법부 내의 관료화, 판사들 간의 이념 갈등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절차의 정의와 결과(또는 내용)의 정의 중 어느 쪽이 우선돼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에 관한 것인 데다, 당사자들이 '법에 정해진 절차를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판사들이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다.

지금 젊은 판사들은 신 대법관에 대해 대법원장이 경고 조치를 내린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고 조치가 나오기까지의 전 과정은 누가 독단적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일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신 대법관의 재판 관여 의혹이 문제가 되자 대법원은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신 대법관, 신 대법관으로부터 재판 간섭을 당했다는 일부 판사들, 신 대법관이 판사들에게 "나와 같은 뜻"이라며 언급했다는 이용훈 대법원장까지 조사했다. 진상조사단은 신 대법관의 행위가 재판 관여로 볼 소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문제를 삼고 있는 판사들은 진상조사단 구성과 조사라는 절차에 대해 특별한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 대법원장은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신 대법관을 대법원공직자윤리위에 넘겼다. 최송화 서울대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윤리위는 대법원 내부 인사 4명, 외부 인사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윤리위는 진상조사 결과와 독일 등 해외의 비슷한 사례를 참고로 내부 논의 끝에 신 대법관이 재판 관여로 인식되거나 오해될 소지가 있는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면서 대법원장의 주의나 경고 조치를 권고했다. 판사들은 윤리위원회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위원회 구성이나 심의 방식 등 절차적인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법원장이 신 대법관에게 경고 조치를 내리자 수용할 수 없다며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대법원이 진행한 일련의 절차에 대해 판사들이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절차를 존중하면서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받아들이겠다는 묵시적인 동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판사들이 이제 와서 결과가 자신들의 뜻과 다르다고 뒤엎으려 하는 것은 결과의 정의를 내세워 절차의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절차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진행됐다고 해도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친 것이다.

어떤 논란이나 갈등의 처리 결과보다 그 결과를 이끌어내기까지의 절차가 공정했느냐를 더 중시하는 게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것만이 정의다'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가 없는 게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각자 의견과 판단이 다르다면 어떤 문제를 푸는 최선의 방법은 갈등 당사자들이 동의하는 객관적인 절차에 맡겨 그 결론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저마다 정의를 내세워 어떤 수단을 써서든 관철하려 든다면 사회는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개혁 성향 판사들을 대변한다는 박시환 대법관은 이번 사태에 대해 "절차와 규정은 합리적인 상황에서나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며 "4·19나 6월 항쟁도 절차와 규정은 지키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지금 사태가 과연 4·19나 6월 항쟁 같은 초법적 저항이 정당화될 만큼 비상한 상황인지는 판사들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