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으로 돌아온 남효원은 다음날로 형방(刑房)에게 해주에서 데려온 감영병 여남은 명을 딸려 청계동으로 보냈다.

"군수 영감께서 진사 어른을 부르십니다. 향장 유만현도 함께 데려오라는 분부십니다."

형방이 은근히 감영병의 위세를 과장하면서 안태훈에게 신천군수 남효원의 명을 전했다. 이번에는 안태훈이 잠시 혼란에 빠졌다. 원래 안태훈은 남효원을 겁주어 기를 꺾고 갇힌 포군과 신도만 빼내려 했는데, 남효원이 해주로 달아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효원이 관찰사 민영철을 부추겨 조정에 알리게 하고, 감영병 2백까지 얻어 왔다니 함부로 힘으로만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님, 박석골 싸움 때처럼 선수를 칩시다. 감영병 2백이랬자 별것 아닙니다. 밤을 틈타 신천 관아를 들이치면 남효원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형방을 내보내고 형제만 방안에 남게 되자 안태건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왠지 안태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진노한 조정에서 경군(京軍)이라도 내려 보내게 되면 어쩔 테냐? 토끼간도 안 돼 해주까지 달아났던 남효원이 이제는 한껏 젖히고 앉은 채로 형방을 보내 하는 수작을 보니, 무언가 단단히 믿는 데가 있는 듯하다. 함부로 무력을 써서는 아니 되겠다."

"그럼 이대로 끌려가실 생각이십니까? 남효원이 무슨 생각으로 형님을 부르는지 알 수 없는 데다 청계동에 끌려와 매질을 당하고 닷새나 갇혀 있었던 유만현도 적지 않이 앙심을 먹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신천 관아에 끌려가셨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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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함께 있던 중근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저와 넷째 아버님이 우리 포군과 장정들을 모조리 이끌고 가만히 아버님을 뒤따르면 어떻겠습니까? 소문이 들어가면 남효원이 아버님께 함부로 할 수도 없거니와, 여차하면 군사를 풀어 응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 된다."

안태훈이 그렇게 대답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안태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사포(私砲)의 무력을 쓸 때는 아닌 것 같다. 이제 천주와 양대인(洋大人)이 어떻게 우리를 구하는지 시험해볼 때가 됐다. 나 혼자 가서 남효원을 만나보겠다. 너희들은 포군들과 장정들을 단속해 동천(洞天)을 잘 지키고 있어라. 너희들이 움직여야 할 때가 있으면 달리 기별하마."

그리고 다시 중근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떠나는 즉시 말을 내어 마렴으로 달려가거라. 가서 홍교사(빌렘 신부)에게 여기 일을 전하여라. 결전(結錢) 일만 빼고 모두 네가 본 대로 일러주면 된다."

이어 안으로 들어가 단정한 두루마기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선 안태훈은 광에서 풀려나온 향장 유만현과 함께 신천 형방 일행을 따라 청계동을 나섰다. 중근도 그런 아버지를 뒤따르듯 말을 내어 안악의 마렴 본당으로 달려갔다.

중근이 마렴에 이른 것은 그날 오후 3시쯤이었다. 빌렘 신부는 마침 본당에 머물고 있었다. 중근이 결전을 걷은 일과 포군을 앞세운 얘기는 빼고, 갇혀 있는 천주교 신도들과 그들을 빼내기 위한 안태훈의 노력만을 얘기한 뒤, 그 뜻 아니 한 반전(反轉)을 일러주자 빌렘 신부는 성난 기색이 되어 주먹을 부르쥐었다.

"알았다. 도마. 먼 길에 수고했다. 나는 이 길로 신천 군수를 만나러 가겠다. 너는 청계동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안심하라고 해라. 내 오늘밤 안으로 반드시 안 베드로와 갇혀 있는 교우들을 구해 청계동으로 보내마."

그날 초저녁 신천 관아에 이른 빌렘 신부는 막 저녁상을 물린 군수 남효원과 만났다. 빌렘 신부는 전교 활동을 보장하는 한불수호조약의 조항으로부터 통리아문(統理衙門) 시절의 관문(關文:지역 관리들에게 선교사의 통행편의와 보호를 요청하는 문서)과 호조(護照:통행증) 등을 내밀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