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책(戰國策)' '정관정요(貞觀政要)' '육도(六韜)' '삼략(三略)' '시품(詩品)' '당재자전(唐才子傳)' '명심보감(明心寶鑑)' '설원(說苑)' '박물지(博物志)' '열녀전(列女傳)' '안씨가훈(顔氏家訓)'….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다. 후대에 끊임없이 인용된 이 고전들은 공통점이 있다. 임동석(林東錫·60)이란 학자 이전에는 국내에 제대로 된 완역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출간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임동석 건국대 중문과 교수에게 2009년은 숙원이 이뤄지는 해다. 100권 분량의 총서 '임동석 중국고전 100'(동서문화사)이 빛을 보는 것이다. 55종의 고전을 완역한 총서는 6월까지 50권, 연말까지 나머지가 출간된다. 200자 원고지로 20만장 분량, 대만 유학시절부터 30년에 걸친 작업의 결실이다.

"한문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습니다."

임동석은 1949년 충북 단양에서 화전민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도 조팝나무꽃이 피는 5월이 오면, 보릿고개 시절 먹을 것을 찾아 산속을 헤매던 유년기가 생각난다고 한다. 일제 말 징용 다녀온 아버지는 학문을 몰랐다. 그는 어머니에게 한글, 동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열 살이 돼서야 비로소 초등학교에 들어간 임동석은 중학교 2학년 때 '십팔사략(十八史略)' 원전을 처음으로 읽었다. 원(元)나라의 증선지(曾先之)가 송(宋)나라까지의 중국 역사를 간추린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그는 꿈을 가졌다. "언젠가 나도 이런 고전을 우리말로 옮겨 낼 수 있을까…."

세상이 어려운 것을 외면하고 전공자마저도 원전을 펼치려 하지 않는 시대, 55종 100권 분량의 동양고전을 완역해 낸 임동석 교수는“고전이 품고 있는 향기까지 제대로 펼쳐보이려 했다”고 말했다.

산전(山田) 파먹고 사는 고향 땅이 싫었던 그는 중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달아났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신문을 배달하며 고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봐 오던 한문 고전들을 뒤적거리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서울교대를 나와 국제대(현 서경대) 국문학과 야간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한문을 잘하니 공부를 더 해 봐라'라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대학원생이 됐다. 수시로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1914~1993) 선생을 찾아가 한학을 배웠다. 1978년 유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그는 이듬해 23달러를 쥐고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4년 뒤 배 곯던 화전민 소년은 중화민국 국가박사학위를 얻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그는 "번역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기뻐했다. 매일 새벽 5시에 도시락 2개를 싸서 학교에 출근한 뒤 5층 연구실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저녁 7시20분까지 작업에 전념했다. 이 일과표는 농사짓는 일과 똑같았는데 아침 10시30분까지 하루 작업량의 3분의 2를 마치는 것도 그랬다.

강의 사이 쉬는 시간 10~15분 동안에도 작업을 했고 식사 도중에도 늘 책장을 넘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원문 입력이나 인덱스 작업마저도 대학원생을 쓰지 않고 혼자서 다 해 냈다. "그걸 남에게 맡기면 누가 다시 교정을 보겠느냐"는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의 고전번역 지원도 받지 않았는데 "그 복잡한 신청서 쓰는 시간이면 책 한 권을 더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끈질긴 강행군 때문에 고혈압과 당뇨까지 생겼지만 '논어'에서 증자가 처음 말하고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다시 썼던 '사이후이(死而後已·죽은 다음에야 그만둘 수 있다)'라는 말을 생각하며 견뎌냈다.

평범한 번역이 아니었다. 부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우리말로 옮겼고, 모든 책의 절(節)마다 일련번호를 붙였다. 각국의 판본을 비교하고 주석을 붙인 뒤 비슷한 내용이 담긴 다른 책의 원문까지 찾아 부기했다.

설화집 '수신기(搜神記)'에 등장하는 고구려 동명왕 신화의 경우 '광개토왕비' '삼국사기'는 물론 '후한서' '위략' '논형' '만주원류고' '제왕운기' '동명왕편'의 관련 내용까지 모두 뽑아 수록했다. 이런 번역본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었다.

그의 노력은 1996년에 결실을 보는 듯했다. 한 출판사에서 '한전대계'란 제목의 전집을 기획해 그의 번역본 5권을 출간했다. 그러나 IMF 사태로 나머지 책의 출간이 좌절됐다. 그 뒤로는 가시밭길이었다. 출판사들은 "다이제스트 아니라면 요즘 세상에 그런 책들이 팔리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학문의 뿌리가 되는 것이 고전인데… 이 시대가 어려운 것을 싫어하고 있구나!" 좌절한 그는 한때 원고를 죄다 고향으로 가지고 내려가 불태우려다 주위의 만류로 그만뒀다. 여러 출판사에서 한 권씩 책을 내는 게릴라식 전술을 쓰며 버텼다. 원고가 난도질당하거나 자비로 출판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제 곧 나올 100권의 전집은 "사운(社運)을 걸고 해 보겠다"는 출판사측의 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동석 중국고전 100'은 문·사·철의 수많은 전공자들을 들뜨게 할 고전들로 가득 차 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물론, 조선시대 관리가 의무적으로 읽었던 당 태종의 정치문답 '정관정요', 맹모삼천의 고사를 담은 '열녀전', 붓글씨 이론서 '서보(書譜)', 어린이 훈육서 '몽구(蒙求)'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됐다.

임 교수는 "동양고전은 인간의 삶과 도덕, 지혜, 과학과 문화예술이 다 들어 있는 무궁무진한 샘과 같다"고 말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핏줄 속에도 여전히 그 DNA가 남아 있는 것이죠. 이 책들이 개인의 행복과 우리 인문학 발전의 밑바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