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실장

지난 연말 아사히(朝日)신문에 인상 깊은 연재 기사가 나왔다. 빈곤 퇴치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들 얘기다. 20년 이상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군림해온 나라에 무슨 빈곤층이 있을까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용역, 파견 같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대거 실업자로 전락, 빈곤층 문제가 대두됐다.

'반빈곤(反貧困)'을 내건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 NGO(비정부단체)와는 판이하다. 스케일부터 단체라는 표현이 쑥스럽고 동아리 같은 초미니급이다. 어느 조합은 회비가 월 500엔, 1000엔이다. 조합원이 병들어 일당을 벌지 못하면 하루 1000엔씩 무이자로 대출해준다. "라면 한두 그릇 값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라고 반문하겠지만, "낙오자에게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음이 들도록 해보자"가 그들의 소박한 목표다. 거국적인 일을 벌인답시고 이권에 개입하고 수억원 협찬금을 징수하는 큰손 운동가는 없다.

성격도 오밀조밀 다양하다. 빈곤층의 중3 수험생 공부를 돕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한 상담 전화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홈리스(homeless)를 돕는 모임에는 변호사 13명이 모였다. 앞에는 '아름다운 간판'을 걸고 뒤에서는 찬조금을 모아 빌딩을 올리는 NGO는 없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계층을 선동, 과격 투쟁하는 곳도 없다.

잔잔한 자극을 받을 만한 일은 더 있다. 좁쌀 단체 50여곳이 모여 전국 네트워크를 구성하더니 푼돈 모아 비정기 잡지를 냈다. 도쿄 한복판 히비야 공원에 실업자를 집결시킨 후, 백수 텐트촌을 만드는 이벤트도 벌였다. 빈곤층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몸부림이다.

빈곤층 문제가 일본보다 심각한 한국에서는 이런 시민운동이 오히려 낯설다. 물론 교회와 절, 성당에서 벌이는 무료 식당 같은 활동은 그런대로 활발하다. 하지만 실업이나 빈곤이라는 '상품'으로는 쏠쏠한 벌이가 안 된다고 보는지, 아니면 그런 일에 나서봤자 의원·장관 자리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지 앞장서는 운동가조차 드물다.

이 혹독한 불황에 실업자로 추락한 비정규직들의 아픔, 대형 마트의 할인 세일 공세에 눌려 문을 닫은 자영업자들의 분노, 그리고 얼마의 정부 보조금을 받아야 하는지 모른 채 담당 공무원들이 챙겨 쓰는 줄도 모르는 극빈층(생활보호 대상자)의 권리를 대변해주는 변변한 조직이 없다. 이 때문에 실업의 고통, 빈곤층 추락의 후유증은 몽땅 가정 안으로 몰려드는 것이 한국형 불황의 대표적 풍경이다. 정부·시민단체가 불황의 잔해(殘骸)를 처리해주지 못해 모든 찌꺼기가 가계로 넘겨지는 셈이다.

어느 모임에서 한 주부가 3재(災)가 들었다고 한탄했다. 무슨 점쟁이 화제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작년에 대학 나온 아들은 취직 못했고, 아빠는 나이 제한에 걸려 명퇴했어요." 두 실업자에 아파트 대출금 부담까지 재앙이 겹쳤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 가정이라면 끼니를 굶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 자료를 보면 최저 생계비(3인 가족, 월 108만1186원) 이하의 소득으로 하루를 이어가는 가구는 260만 가구에 달한다. 여기에 불황 장기화로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 가구까지 합하면 줄잡아 350만 안팎의 가구는 언제든지 '빈곤의 다리' 아래 살아가는 처지에 놓인다. 여차해서 소비 지출을 절반으로 줄인 후 6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가정도 46%밖에 안 된다. 직장을 잃으면 곧바로 빈민 자격증이 자동 발급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다행스럽게도 청와대 미래기획위원회가 이번 주 '중산층 키우기 휴먼 뉴딜'이라는 구상을 내놓았다. 빈곤층을 돕는 예산을 늘리겠다는 것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부자 정권, 재벌 정권이라 비판받으며 용산 철거민 참사까지 겪은 이명박 정부 입장에서는 모처럼 자랑할 만한 행보다. 다만 '휴먼 뉴딜' 구상이 장관 회의나 결성하고 청와대 안의 행사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극빈층에 생계비를 주는 제도는 김대중 정권이 만들었다. 이번 정권은 여기에 보태 자영업자, 영세 제조업 종사자, 비정규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들에게 그저 생계비·병원비를 주는 선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일자리를 잃어도 '지출을 40% 줄여 최소한 1년'을 버틸 수 있는 생활비를 대주는 파격 발상이 필요하다. 또 이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직업 훈련, 전직 알선, 창업 지원에도 이참에 대담한 투자를 해야 한다.

때로는 반(反)빈민 운동가들과 손잡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저소득층에 쌀쌀맞다는 인상을 남긴 정권이 그들에게도 따스하고 인간적인 햇살을 비추려고 애쓴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가야 할 길이 멀고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