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훌쩍 넘긴 키다리 가수 서수남이 인터넷의 파워 블로거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아내가 잘못된 재테크로 전 재산을 날리고, 거기에 16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채빚을 남긴 채 떠난 이후 재기하며 깨달은 인생의 지혜를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가수 서수남의 명함 뒷면엔 각종 동물들에 둘러싸인 그의 캐릭터가 노래(아마도 동물농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인터넷 주소가 하나 적혀 있다. http://blog.naver.com/suhsoonam 그의 블로그다. 하루 평균 방문자만 2000명 가까이 된다. 이달 중순 현재 45만 여명이 그의 블로그를 다녀갔다.

서수남은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블로그를 시작한 지 13개월쯤 됐다”면서 “처음에는 나만의 음악세계를 표현하고, 못다 이룬 음악의 꿈들을 조금이나마 되살리고 싶어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블로그가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서수남 노래 듣기’ ‘서수남의 컨트리뮤직’ ‘서수남 공연 동영상’ 등 음악적 내용도 많지만, ‘My Life’ ‘서수남의 이웃 이야기’ ‘유람기’ ‘사진 찍는 법’ ‘골프 이야기’ 등 생활에 관한 내용이 더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읽다 보면 요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블로그 관리를 위해 하루 네다섯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그렇게 일주일에 4~5개 정도를 꾸준히 포스팅하고 있다. 최근엔 네이버 블로그 메인 페이지 ‘Meet the blogger’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일찍 남편을 잃고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키웠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해 억지로 한양대학교에 원서를 냈고, 1961년에 그는 마음에도 없는 대학생이 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문화방송 콩쿠르에 나가 1등상을 받은 그는 자신감을 얻었고 당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친구 홍광식과 듀엣을 이뤄 동아방송 콩쿠르에서 또 다시 대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아들이 가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억지로 군대에 입대시켰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는 결국 1964년 휴학을 하고 당시 가장 최신의, 수준 높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던 미8군 클럽을 찾아가게 된다. 실력을 인정받으며 컨트리 음악을 하다가 그를 찾아온 하청일 등 3명과 함께 ‘아리랑브라더스’를 결성하고 잠시 활동했지만 팀은 곧 해체된다.

그리고 당시 대세였던 그룹사운드를 다시 결성해 워커힐 쇼 무대에 선 그는 KBS 성우였던 현혜정을 만나 함께 활동을 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팀을 나와 그녀와 듀엣으로 활동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현혜정과 결혼을 하지만 6개월 만에 파경을 맞고 말았다.

“그러면서 결성하게 된 것이 ‘서수남-하청일’ 듀엣이지요. 1969년 MBC 개국 프로그램에 나가면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수다쟁이’ ‘팔도유람’ 같은 코믹송을 만들어 부른 것도 그때예요. 우리나라에는 예전부터 ‘빈대떡 신사’같은 만요(漫謠)의 전통이 있었거든요. 그걸 신세대풍으로 부른 것이었는데, 운 좋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죠.”

“하지만 20년이 지난 어느 날 뒤돌아보니 남는 것이 별로 없더군요. 하청일 씨는 이전부터 해오던 사업(스포츠용품 사업)이 크게 잘 되어 이미 가수생활이 부업처럼 된 상황이었고, 발표하는 노래도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실력이 바닥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노후 걱정도 되었지요. 그래서 1988년부터 시작한 것이 ‘서수남 음악학원’이었습니다.”

음악학원은 ‘노래교실’과 ‘기타교실’로 나눠 운영했다. 그 중 ‘노래교실’이 특히 주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입소문을 타고 각 백화점문화센터에서 노래 강좌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중엔 일주일에 20회까지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좌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강사비도 천정부지로 솟았다.

스스로 ‘등 따습고 배부르던 시절’이라고 부르던 그 때. 외부 노래 강좌를 다니다 보니 ‘서수남 음악학원’을 일일이 챙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음악학원의 실장을 맡기고 재정적인 관리를 부탁했다. 그러던 중 2000년 9월 24일, 그의 아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편지만 한 장 달랑 남겨놓은 채 사라졌다. 확인해보니 아내는 그 동안 잘못된 재테크로 그가 번 돈을 몽땅 날리고, 거기에 16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까지 사채빚으로 남겨 놓았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아흔 넘은 노모를 모시는 그로서는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신앙에 의지해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열심히 살면서 빚을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2006년이 되어서야 그의 주위에서 빚쟁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아내가 사라지고 나서 노래교실을 그만두었습니다. 학원을 찾는 주부들 보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숨기고 그분들에게 차마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4천만~5천만 원 가까이 되는 월 수익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 방송을 다시 시작한 후 2005년 말까지, 정말 방송을 많이 했습니다. 2006년, 주변 정리가 거의 되고 나서, 그제서야 ‘못 다 이룬 꿈을 이뤄보자’는 생각에서 새로 앨범을 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랑 받는 나이는 지났구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아야지, 생각했습니다. 빚을 갚으면서 배운 소중한 사실이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힘들게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라도 내가 쓰는 동안만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기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는 자신이 활동을 너무 오래 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제는 음악이나 연기 등에 너무 욕심내지 말고 인생을 조금씩 정리해 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인생 경험에서 얻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것.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블로그 활동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데 시간을 많이 빼앗기니 당연히 일하는 시간이 줄었다. 수입도 이전에 비해 반 이상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의 블로그에는 특이한 카테고리가 하나 있다. '서수남의 인터뷰'. 그가 직접 섭외하고 인터뷰하는 코너다. 사진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매니저가 찍어준다. 지금까지 코미디 작가의 대부 오경석, 그가 사랑하는 후배 전유성, 연극인 성병숙, 팽현숙, 고두심, 고은아, 이원승 등이 그의 인터뷰에 등장했다.

그는 최근 ‘잘 될 거야’라는 디지털 싱글을 발표했다.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싶어 만들었다고 한다. 정식 앨범을 낼 계획은 없지만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퍼가고 옮기며 ‘사용해’더 많은 이들이 듣고 힘을 냈으면 한단다.

※자세한 내용은 여성조선 4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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