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yle="cursor:pointer;" onclick="window.open('http://books.chosun.com/novel/lmy/popup.html','se','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no,menubar=no,scrollbars=no,resizable=no,copyhistory=no,width=1000,height=710,top=0');"><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tn_view.gif" border="0" align="absmiddle"><

"마침내 조정에서 해주 감영에 명하기를, 김창수를 인천의 감리서로 넘기라 하였다더라. 김창수는 내달 초순에 배에 태워 인천으로 옮기는데, 인천의 순검청(巡檢廳)에서 수십 명 순검을 보내 수륙(水陸) 간에 엄히 호송할 것이라 한다."

꼭 누가 보고 와서 전하는 것처럼 김창수의 근황을 일일이 전하더니, 인천으로 떠난 뒤부터는 한층 자상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가 되어 매일같이 새로운 소식을 실어왔다. 서울에 새로 생겼다는 신문이라는 것보다 더 빠르고 상세할 성싶었다.

"김창수는 7월 초순에 나진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는데, 그 어머니가 홀로 아들을 따라 배에 올랐다더라. 가는 도중에 그 어머니가 '고생 끝에 모진 형을 받고 죽느니 차라리 함께 바다에 뛰어내리자'고 하였으나 오히려 김창수가 꿋꿋하게 말려 모자 함께 자진(自盡)하는 참사는 면했다더라."

"인천에 이른 김창수의 어머니는 어떤 돈 많은 물상객주(物商客主) 집에 동자아치(부엌데기)로 들어가 아들의 옥바라지를 시작하였다더라. 하루 세끼 김창수에게 사식(私食)을 넣어주는 것으로 품삯을 대신하니, 보는 이가 모두 가긍히 여기더라."

그러더니 소문은 점점 더 애조와 비분을 띠어갔다.

일러스트 김지혁 <a style="cursor:pointer;" onclick="window.open('http://books.chosun.com/novel/lmy/popup.html','se','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no,menubar=no,scrollbars=no,resizable=no,copyhistory=no,width=1000,height=710,top=0');"><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tn_view.gif" border="0" align="absmiddle"><

"김창수가 감옥 안에서 자진하려 하였다더라. 허리띠로 목을 매어 이미 숨이 끊어졌으나 같은 차꼬를 차고 있던 다른 죄수들이 김창수가 숨이 넘어가면서 한 발버둥질에 알아차리고 그를 구해냈다더라. 얼마나 원통하고 괴로웠으면 그 철석같은 가슴에 자진할 마음이 일었겠는가."

"마침내 신문이 시작되었는데, 감리서의 관리들이 모두 김창수의 충성과 의기에 감복하여 도리어 죄인처럼 김창수를 바로 쳐다보지 못할 지경이라 한다. 이제는 감옥도 다른 잡범들과 따로 쓰게 하고 몸에는 칼이나 차꼬를 채우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이어 뜻있는 이들이 김창수의 어머니에게 돈을 대어주며 옥바라지를 격려한 일, 신문이 있는 날은 먼빛으로나마 김창수를 보려고 경무청(警務廳) 인근 지붕과 담장 위까지 구경꾼들이 몰려들던 일과 감리서(監理署)가 방청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하던 일 따위가 감동적인 소문이 되어 전해오더니, 마침내 소문은 김창수를 우러르고 찬양하는 어조로 변해갔다.

"요즘 인천 감리서 앞마당은 김창수를 면회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더라. 또 김창수의 어머니 곽씨에게 돈을 대는 이들 중에는 향촌의 지사와 부호들뿐만 아니라 이름 대면 알 만한 고관도 있으며, 어떤 이는 을미(乙未)의병의 으뜸가는 공을 김창수에게 돌려야 한다고 떠들기도 한다더라."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중근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것도 한길이었던가. 그는 이렇게 길을 찾은 것인가…….'

그리고 아직도 막연하게 기다리고만 있는 자신을 가슴 섬뜩한 느낌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중근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뒷날 중근이 쓴 자서전(安應七 歷史)에 보면 그 시절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 내 나이 열일여덟 나던 때라 젊고 힘이 세어 기골이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내가 평소 즐겨하던 일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첫째는 벗을 사귀어 의를 맺는 일이요(親友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는 총포로 사냥을 나가는 일이요(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내닫는 일이었다(騎馳駿馬).'

얼른 보면 그 네 가지 일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멋대로 즐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냥이나 기마(騎馬), 결의(結義)는 아버지가 그저 묵인한 정도였고, 술과 노래와 춤 또한 이미 성인이 된 그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라도 아직 드러내놓고 즐길 것은 못 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평소 즐겨하던 일로 내세울 수 있었던 첫 번째 시기는 안태훈이 여러 달 청계동을 비운 그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겉보기로는 그 네 가지 일 모두가 방일(放逸)이거나 도락(道樂)처럼 보이지만 그때의 중근에게는 나름의 길 찾기였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