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박사는 2006년 독일월드컵 대표팀의 주치의였다.



이미 2002년 한-일월드컵을 경험한 터라 대표팀에선 터줏대감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코칭스태프는 그라운드에서 선수를 보고, 김 박사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체크하니 사실 선수들에 대해 김 박사만큼 속속들이 많이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독일월드컵 개막이 코앞에 닥쳤을 때였다.

김 박사는 선수들을 위한 '야심작' 하나를 준비해 두고는 흐뭇해하고 있었다.

피로 회복에 잘 듣는 성장호르몬 성분의 주사제였다. 선수들의 컨디션은 전력과 직결되는 문제라 김 박사는 각별히 신경을 써 다섯 박스(500앰풀)를 준비했다. 김 박사가 선수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기도 했다.

한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도핑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선수들에게 주사하지 마라. 나는 대표팀에 어떠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싫다."

악을 쓰고 싸워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가 막히더군요. 명색이 주치의인데 도핑 정도를 생각 안 했겠습니까. 이미 직원들에게 주사를 놓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보내 도핑 테스트를 했죠.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컨트롤센터는 세계적인 수준이라 거기서 안 걸리면 FIFA 도핑에 걸릴 리 만무하거든요."

그렇다고 꺾일 김 박사는 아니었다.

외국인 감독의 '자기 안녕'을 위한 이기적인 결정에 선수들의 피로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선수들에 한해 몰래몰래 주사를 했다. 선수들은 지쳐 가는데 눈 뻔히 뜨고 특효약을 썩힌다는 게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의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의 막연한 걱정 때문에.

나이 많은 선수들은 앞다퉈 김 박사에게 팔을 내밀었고, 딱히 주사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선수들은 토고를 2대1로 꺾고, 프랑스와 1대1로 비기는 명승부를 펼쳤다. 물론 도핑 테스트에 걸린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김 박사는 그 좋은 약을 한 박스밖에 못 쓰고 온 게 지금도 아쉬워 죽겠단다.

남은 네 박스는 유효기간도 있고 해서 파주NFC에 훈련 들어온 프로선수들에게 인심을 썼다.

"유럽에선 선수의 출전 여부를 주치의가 결정하는데, 한국에선 아직도 감독이 하죠. 선수의 몸 상태는 주치의가 가장 잘 아는데도 말입니다. 선수 부상은 감독 책임 아닙니다. 주치의 책임이지."

김 박사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도 주치의로 가게 된다면 아마 우리 선수들은 그 주사를 원 없이 맞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