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위(大院位) 시절만 해도 관부에 들키기만 하면 두릅 엮듯 엮이어 가 떼죽음을 당하던 천주학쟁이들 아니냐? 거기다가 양대인(洋大人)은 무슨……저희가 목 잘려 내걸릴 걱정하지 아니하고 거리를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된 게 이제 몇 해 된다고. 그런데 그 천주학과 양교사(洋敎士:서양 신부)들에게 무슨 위세가 있어 우리 방패막이 노릇까지 해줄 수 있단 말이냐?"

안태진이 다시 끼어들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안태훈이 그런 맏형의 물음을 공손하게 받았다.

"형님, 강대한 불란서의 힘을 업고 있는 그 사람들을 전처럼 얕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제 양대인들은 조선의 국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호조(護照:통행증) 없이도 조선 팔도 어디든지 가서 천주학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불란서라면 지난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대패하고 쫓겨 간 법국(法國)을 말하는 것 아니냐? 그것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천주학쟁이들과 양교사들을 뒤 봐준단 말이냐?"

"그들이 정족산성에서 대패했다는 말도 그 실정(實情)이 어쨌는지는 잘 알 수 없거니와 병술년(丙戌年:1886년) 수호통상조약으로 다시 이 땅에 온 불란서는 그때와 많이 다릅니다. 일본도 불란서를 두려워하는 바 지난달 저들은 독일 아라사와 함께 청일전쟁 배상에 간섭하여 일본이 삼킨 요동(遼東)반도를 다시 토해놓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땅의 양대인들은 바로 그 불란서가 나라를 들어 지켜주는 외방(外方)선교사들인데, 무력한 조선 조정이 어찌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안태진도 조금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말을 끊고 맏형을 바라보던 안태훈이 차분히 이었다.

"경상도에서는 촌민들이 양대인의 길을 막고 욕하다가 관아로부터 엄벌을 받고, 전라도에서는 아전에게 빼앗기게 된 천주교인의 땅을 양대인이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양대인의 시중꾼 노릇을 몇 달 한 적이 있는 어떤 천주교인이 양대인의 서류를 가지고 다니며 양반을 겁주어 그 재물을 빼앗은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천주교인과 양대인의 위세를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안태진도 알아들은 눈치였다.

"작년 난리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쫓겨 다니던 동학군들이 '서교투탁(西敎投託)'이라 하며 떼를 지어 천주학쟁이로 돌아서고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서학과 양대인의 위세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조석(朝夕)으로 변한다는 게 이런 것이로구나."

"서울 종현(鍾峴:지금의 명동)에 새로 짓고 있는 그들 예배당의 규모만 봐도 실로 엄청납니다. 불에 구운 벽돌로 백오십 평 넓이에 열다섯 길 높이로 본채를 짓고 뾰족탑을 세운다는데, 뾰족탑 높이가 서른 길이 넘어 그것이 서면 서울의 어떤 궁궐 용마루보다 높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또 우리 조선에는 거기 쓸 벽돌을 굽거나 양회(洋灰)를 써서 그 벽돌을 쌓아올릴 줄 아는 일꾼이 없고 나무를 양식(洋式)으로 다룰 줄 아는 목수도 없어 모두 중국에서 데려와 쓰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공사가 멈춰진 적도 있었지만, 시작한 지 5년째인 내년은 되어야 대강이나마 벽체가 드러날 것이라 하니, 저들이 거기에 들이는 정성과 물력(物力)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태진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싫은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천주학과 양대인들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조상의 향화(香火)를 지켜가야 하는 나로서야 제사도 못 지내게 하는 천주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맏이로서 하는 그 말에는 안태훈도 잠깐 낯빛이 흐려졌다. 그때까지와는 달리 한참이나 대꾸를 못하다가 얼버무리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