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박연차(64) 태광실업 회장이 그동안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가 수면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박 회장이 검찰 조사에서 거명한 정치인 3명 가운데 P씨로 지목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돈은 받았지만 불법자금은 아니다"며 돈을 받은 사실 자체는 시인했다.

그럼에도 검찰은 "정치권 로비 의혹에 대해 조사한 바 없다"며 '불 끄기'에만 급급하고 있어 그 속사정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검찰 주변에선 "박 회장이 정치인을 거명한 건 틀림없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진술을 했기 때문에 검찰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검찰 수사가 박 회장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박 회장이 진술한 정치인 3명은 각각 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다. 현 정권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기업인 한명도 끼워 넣었다.

이는 자신의 인맥이 여야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점을 암시해 '해볼 테면 한번 해보라'는 듯한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그가 진술한 정치인 3명 중 2명은 이미 정계를 은퇴한 '무대 밖의 인물'이고, 노 전 대통령의 측근 L씨는 박 회장측과 입을 맞추기 쉬운 사람이다. 박 회장은 돈 준 사실을 털어놓으면서도 "호의로 준 것"이라며 대가성이 없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검찰이 대가성 여부를 끝내 밝히지 못하면 형사 처벌이 불가능해진다.

대검 고위 관계자는 20일 "박 회장이 조사를 오랫동안 받는 과정에서 '예방주사'를 맞은 것 같아서 조사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검찰이 계속 박 회장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일 리는 만무하다.

검찰은 박 회장의 정치권 로비 의혹 규명에 최소한 3개월쯤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검찰은 국세청 세무조사 자료를 토대로 박 회장이 '항복'할 때까지 가족과 주변을 압박하는 전술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태광실업과 계열사 지분을 상당 부분 갖고 있는 박 회장의 자녀는 편법 증여 의혹까지 받고 있어 박 회장도 어느 시점에서는 '거래'할 수밖에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게 검찰의 계산이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박 회장의 사업경영이 휘청거릴 수도 있다. 농협의 자회사 휴켐스 인수 비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휴켐스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그는 "만약 불법 인수로 드러난다면 휴켐스를 돌려주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검찰 관계자는 "당분간 검찰과 박 회장이 심리적인 힘겨루기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