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61·사진)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의 3·1운동을 민족주의 틀에서 벗어나 문명주의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제언을 내놓았다. 지난 14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개최한 3·1운동 90주년 국제학술회의〈1919년: 동아시아 근대의 새로운 전개〉에서다.

미야지마 교수는 '문명주의'를 "인종·언어·풍속 등의 개별성을 초월해서 보편적인 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입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3·1 독립선언서에서 조선 독립의 의미를 호소한 대목을 문명주의와 연관짓는다. "일본으로 하야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야 동양지지자(東洋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야금 몽매에도 면(免)하지 못하는 불안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구구(區區) 감정상 문제리오." 조선의 독립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하며, 중국은 물론 일본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주장의 바닥에 문명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3·1운동 직후 일본을 방문한 여운형이 "일본의 신의와 국익을 위해서라도 조선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대목도 인용한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목적이 조선 독립을 위해서라며 조선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세계에 밝혔는데, '사기와 폭력으로 조선을 합병한 것'은 일본의 신의를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3·1운동 직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대동단'이 만든 '일본 국민에 고함' 호소문도 "독립 선포가 공존공영의 지성에서 나온 것이지 역사적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썼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의 잘못을 설득하면서 일본의 침략주의가 자기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을 경고하는 태도 역시 문명주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문명주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때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문명의 실현'이었는데, 3·1운동 당시 일본 지배에 반대하는 근거로 문명 논리를 내세운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이 내건 문명은 서구 문명이었는 데 비해, 3·1독립선언서나 대동단이 내건 문명은 동양의 전통문명을 기초로 한 인류 문명이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