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만 강화도령(철종·哲宗)이 있었던 게 아니다. 고려에도 강화도령이 있었다. 고려의 22대 임금 강종(康宗)이 그다.

흔히 고려시대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때 17대 인종(仁宗·재위 1122~1146년)부터 후반기가 시작된다. 이후 인종과 공예(恭睿)태후 임씨 사이에서 난 세 아들 의종(毅宗) 명종(明宗) 신종(神宗)이 차례로 왕위를 잇는다. 재위기간은 의종이 24년, 명종이 27년, 신종이 7년이었으니 아버지와 아들들만으로 80년 이상이 흘렀다. 문제는 허송세월이었다는 데 있었다.

인종은 16대 예종과 문경태후(이자겸의 둘째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대의 실권자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은 대대로 권세를 이어가기 위해 '외손자' 인종에게도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주었다. 아마도 조선의 예종과 성종에게 연이어 딸을 주었던 한명회도 이자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모른다. 인종으로서는 두명의 이모를 아내로 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곧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고 후궁으로 들어왔던 임씨가 인종 7년 왕비로 책봉되어 5남4녀를 낳게 된다.

인종, 이자겸의 딸인 이모 둘을 아내로

1146년 인종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장남 의종(毅宗·재위 1146~1170년)이 18대 왕위를 이었다. 아버지 인종은 사관으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기는 했어도 성품이 어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종은 경우에 따라 조선의 연산군을 능가하는 음행(淫行)과 사치로 일관하다가 결국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 무신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를 거쳐 경주에 유폐되어 있다가 명종3년 10월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태자는 전라도 진도로 추방되었다.

무신들은 인종의 셋째 아들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우는데 그가 19대 임금 명종(明宗·재위 1170~1197년)이다. 명(明)자가 들어간 묘호(廟號)와 달리 명종은 전혀 밝은 군주가 아니었다. 그저 정중부 이의민으로 이어지던 무신정권하에서의 명목뿐인 임금이었다. 묘하게도 고려 때나 조선 때나 명종(明宗)이라는 묘호를 받은 임금은 하나같이 암군(暗君)이다.

이의민 진영과 벌인 시가전이 발단

명종26년(1196년)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아우 최충수의 집 비둘기를 빼앗는 참으로 사소한 일을 계기로 이의민 진영과 최충헌 진영이 개경 십자가(十字街)에서 시가전을 벌였고 승리는 최충헌 진영으로 돌아갔다. 최충헌의 입장에서는 명종이 자기편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 폐립(廢立)시키고 명종의 동복아우를 왕위에 앉힌다.

그가 20대 신종(神宗·재위 1197~1204년)이다. 그리고 명종의 아들 태자는 강화도에 유폐시켰다. 사실 이때 태자 나이 이미 40대 중반이었으니 정확히 말해서 '도령'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임금들은 적어도 20년 이상 왕위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날 나이다.

기록에는 나오는 게 없지만 이 '고려판 강화도령'은 성품이 유순하고 권력싸움에도 별다른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심가였다면 강화도에 유폐되기 전에 죽거나 15년 후 최씨 정권이 희종을 폐립시키면서 대안으로 선뜻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도 조선판 강화도령 철종과 비슷하다.

15년 유배 끝에 결국 왕위 오르지만…

1204년 재위 7년째를 맞은 신종이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장남이 왕위를 이었다. 21대 희종(熙宗·재위 1204~1211년)이다. 이미 나이 50이었던 희종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그는 은밀하게 왕실과 조정 내에 측근들을 길러낸다.

그러나 결국 1211년 12월 내시 왕준명 등이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인해 희종도 최충헌에게 폐립당한다. 사관은 희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스스로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면서 뛰어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왕실을 공고히 했어야 하는데 경박한 모사꾼들에게 귀를 기울여 한때의 분을 풀려다가 추방당하고 말았다.' 동정의 여지도 없다는 평으로 들린다.

이렇게 해서 강화생활 15년 만에 개경으로 복귀해 이듬해 왕위에 오르는 이가 22대 강종(康宗·재위 1211~1213년)이다. 사관은 "일체의 정사(政事)를 강신(强臣·최충헌)의 통제를 받았다"고 평한다. 아마도 그의 역사적 소명은 무려 46년간 재위하면서 어렵게나마 무신통치를 종식시키게 되는 아들 고종(高宗)을 낳은 게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외부적으로 고려는 급속하게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 점에서도 둘 다 '강화도령'에 이어 즉위한 고려 고종과 조선 고종은 많이 닮았다. 역사는 정말로 반복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