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탁·법무법인‘충정’변호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얼마 전 금융위기를 초래한 12가지 원인 중 하나로 '신용평가기관의 오류'를 지목했다.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Moody's)의 최고경영자 맥다니엘은 내부 임원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하원 청문회에서 밝혀졌다. "이러한 과오들은 결국 우리가 신용평가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거나, 아니면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2001년, 대형 회계부정으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부도 신청을 했던 엔론(Enron) 역시 부도 발표 4일 전까지 투자등급을 유지하였으며, 이에 대해 상원 위원회에서는 "신용평가기관의 신뢰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한 바 있다.

신용평가의 오류가 시장을 뒤흔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미국 법원의 입장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신용평가기관에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또 이러한 법원의 보호에 기대어 신용평가기관들은 '신용평가'란 단순히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한데 이를 과신한 투자자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법적 책임에 대한 그들의 논쟁에 앞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의 금융시스템은 신용평가에 대한 비합리적인 신뢰를 유발하면서도 정작 신용평가기관을 제어할 장치는 가지고 있지 않다.

1970년대 이래 미국 정부는 200여 개에 달하는 주법(州法) 및 연방법을 제정하여, 발행증권은 반드시 투자등급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위 법에 적합한 투자등급은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저명한 통계적 평가기관'으로 인정받은 특정 신용평가기관만이 발행할 수 있다. 그런데 저명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투자은행 또는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일정 기간 이상 이용되어야 하니, 이러한 절차는 사실상 모순적이다.

저명하지 못한 신설 신용평가기관이 부여하는 등급을 받아서는 법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니 기관투자자들이 의뢰하지를 않고, 의뢰가 없으니 저명해질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재 신용평가 업무의 80%는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 의하여 독과점적으로 이루어지며, 신용평가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기존 신용평가기관들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로 간주되고 있다.

더군다나 행정규제 기능을 담당하는 미 증권거래위원회는 신용평가기관에 대하여 완전공시 지침(Regulation FD)의 적용을 면제하였다. 따라서 신용평가기관은 기업의 비공개 정보를 취급하더라도 이를 공시할 의무가 없는 바, 신용등급의 결정이 합리적인지, 그 과정이 투명한지에 대한 일체의 감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신용평가기관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법적 책임도 지지 않고, 행정적 규제도 받지 않는다. 신용등급의 질은 전혀 담보되지 않는데도 각종 금융상품들은 트리플에이(AAA)를 앞세워 전 세계를 농락하였고, 이제 미국은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던 미국의 금융시스템에 기반한 제도들이 그동안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수입되지는 않았었는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