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2월, 처형을 한 달여 앞두고 이국의 감옥에 앉아 그는 칼칼한 먹으로 글씨를 썼다. "장부수사심여철(丈夫雖死心如鐵) 의사임위기사운(義士臨危氣似雲)." 사나이는 죽음에 임해도 마음이 강철 같으며, 뜻있는 선비는 위태로움에 처해도 기운이 구름 같다는 뜻이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유묵 ▲기록사진 100여 점 ▲안 의사의 인생 행적을 보여주는 당시 신문기사 등을 집대성한 대형 전시가 오는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안 의사의 유묵이 두어 점씩 공개된 적은 있지만, 안 의사의 유묵만 따로 모아 이 정도 규모와 밀도로 보여주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예술의전당,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한다.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가 쓴‘인무 원려필유근우’( 3 9 × 149cm). 멀리 고민하지 않으면 가까운 시일에 근심이 생긴다는 뜻이다. /DB사진 안중근 의사가 쓴‘임적 선진위장의무’( 3 5 × 139cm, 보물 569—26 호). 적을 맞아 앞서 나 가는 것은 장수의 의무 라는 뜻이다. /DB사진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 에서 자신의 감시를 맡았 던 일본군 헌병에게 써준 ‘위국헌신군인본분’(안 중근의사기념관 소장 ₩126.1×25.9cm, 보물 569—23호).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예술의전당 제공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 옥에서 명주 천에 검은 먹으로 쓴 유묵‘국가 안위노심초사’(안중근 의사기념관 소장·42× 152cm, 보물 569—22 호.). 국가의 안위를 걱 정하고 애태운다는 뜻 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8연발 자동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고, 그 자리에서 일경에 체포됐다. 안 의사가 남긴 유묵은 이듬해 2~3월 순국(殉國)을 앞두고 여순 감옥에서 쓴 것이다.

일본인 관리들이 자국 지도자를 쓰러뜨린 안 의사에게 감화돼 안 의사의 글씨를 소중히 보관하다가 후대에 전했고, 그중 일부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현재 존재가 확인된 유묵은 60점 안팎이며 이 가운데 30점이 한국에, 나머지는 일본에 있다.

한국에 있는 30점 가운데 26점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고, 나머지 4점은 미공개작이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에 있는 안 의사의 유묵 전체를 망라할 뿐 아니라 ▲일본에 있는 유묵 중 특히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 10여 점 이상이 나온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는 "미술사적 관점에서 안 의사의 유묵은 추사 김정희에 버금가는 향기가 있다"며 "안 의사의 글씨는 '충절의 화신'으로 숭앙받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709~786)의 해서(楷書)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글씨와 생애와 사상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보는 이의 가슴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감동이 있다"고 했다.

안 의사의 글씨는 ▲남성적인 박력 ▲엄정한 법도 ▲삼엄한 기개가 특징이며, 마제잠두(馬蹄蠶頭·말 발굽과 누에 머리) 형상으로 뻗어나간 한 획 한 획에 꺾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기상이 깃들어 있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