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는 ‘욕망’의 도시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나, 콜카타, 첸나이 등 다른 대도시와는 달리 사람의 ‘살’ 냄새, ‘돈’ 냄새가 물씬하다. 인구 1360 만 명의 인도 최대 도시로 인도 경제-연예·오락산업의 중심지다. 그 뭄바이가 11/26 테러 공격을 받고 180여 명이 사망, 충격을 주고 있다.

뭄바이는 부산과 비슷하다. 남북으로 길다. 뭄바이 공항에 내리면, 이번에 테러 공격을 받은 콜라바 지역까지 1시간 이상 택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인도 제1의 항구 도시라는 점도 같다. 서쪽은 아라비아 해이고, 동쪽은 데칸 고원으로 연결된다.

뭄바이는 ‘인도 제일’을 자랑하는 게 많다. 우선 최고의 갑부들이 산다. 무케시 암바니(Ambani)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즈 그룹 회장, 라탄 타타(Tata) 타타그룹 회장의 집이 뭄바이에 있다. 힌디 영화의 산실 발리우드의 수퍼 스타 아미탑 박찬(Amitab Bachchan)과 샤룩한(Shah Ruk Khan)도 뭄바이 시민이다. 인도 최대의 창녀촌, 아시아 최대의 빈민촌 ‘다라비’(Dharavi·거주민 60만명), 그리고 다웃 이브라힘(Dawood Ibrahim)이 이끄는 무슬림 갱단도 인도 최고다.

■ 1993년 힌두·무슬림 충돌과 그 여진

-“몸에 불이 붙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몸에 불이 붙으니 일어났다가, 넘어지고, 죽으라고 달리고, 또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달리죠.”

인도 뭄바이의 오늘을 잘 묘사한 베스트셀러 ‘맥시멈 시티’(Maximum City, Mumbai lost and found·2006년 간)의 저자 수케투 메타(Suketu Mehta)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저널리즘)가 물었다. 힌두 우파 정당 ‘쉬브 세나’의 당원 ‘수닐’이 답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더 지났다. 수닐은 자신이 석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여 죽인 무슬림의 최후 순간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뭄바이의 오늘을 규정하는 단어는 ‘테러’다. 2008년 11월 29일 뭄바이 테러는 그 뿌리가 1992년에 있다. 그 해 12월 뭄바이에서 북쪽으로 수백㎞떨어져 있는 아요디아(Ayodhya)란 도시가 진양지다. 아요디아에서는 오래돼 쓰러져가던 모스크 한 곳이 힌두 우파의 공격을 받아 파괴됐다. ‘바브리 마스지드’라고 불리던 사원은 무슬림 제국이던 무굴의 초대 황제 바브르(Babur)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었다. 바브르 황제는 힌두 전설상의 영웅이자 왕이었던 ‘람’의 궁전 터에 의도적으로 사원을 세웠으며, 이는 힌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힌두 우파들은 주장했다. 빨리 없애버려 마땅한 건물이었고, 힌두 우파는 오랫동안 이 날을 별러 왔다.

아시아 최대의 빈민촌이라는 다라비의 한 지역. 도시 한복판에 있다.

1992년 12월 바부르 마스지드 파괴가 알려진 뒤부터 다음해 1993년 4월까지, 뭄바이에는 모두 세 차례의 테러 광풍이 불었다. 1400명이 죽었다. 처음 충돌은 바브리 모스크를 파괴에 항의하는 무슬림과, 이를 저지하는 힌두 경찰간에 발생했다. 1992년 12월이었다. 해가 바뀐 직후 1993년 1월에 일어난 두 번 째 폭동은 보다 심각했다. 뭄바이의 지방 정치 세력이자 힌두 극우 정당인 쉬브 세나(Shiv sena)의 선동을 받은 힌두 폭도들이 무슬림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그들의 집과 상점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마지막은 3월 12일 무슬림의 보복 폭탄 테러였다. 뭄바이 증권거래소, 인도 항공 등 뭄바이 10곳에서 폭탄이 터져 317명이 숨졌다. 무슬림 갱단 두목이 다웃 이브라힘이 배후 조종자였고, 두 달 전 힌두 폭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1993년 1월 당시 뭄바이의 빈민촌 내 무슬림 구역 한복판인 라다바이 촐 동네의 한 집에서 힌두 가족 6명이 곤히 자고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방문을 잠갔고, 창문을 통해 불붙은 석유 병을 안으로 집어 던졌다. 안에 갇힌 사람은 절규했지만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16, 20명이 힌두 여성들이 조게쉬와리 지역에서 강간당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건은 힌두를 자극했다.

2004년 출간된 ‘맥시멈 시티’의 저자 수케타 메타가 만난 뭄바이의 힌두교도 수닐.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있었는데 무슬림 한 명을 태워 죽였습니다. 새벽 4시에 라다바이 촐 사건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어요. 남자, 여자들 모두 손에 뭔가 무기들을 쥐고 있었죠. 무슬림 동네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큰 길에서 빵을 구워파는 ‘빠브 왈라’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무슬림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빵을 매일 사러갔죠. 사람들이 그에게 석유를 뿌렸고, 내가 불을 붙였습니다. 그는 울부짖었죠. ‘애가 있어요. 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라다바이 촐에서 너희가 죽인 사람도 애가 있다는 걸 생각안했냐?’”

개인 택시 운전을 하는 라가와 다른 힌두들은 무슬림 두 명을 불태워 죽였다. 그는 길을 가는데 쉬브 세나 청년 당원들을 향해 뜨거운 물을 뿌린 무슬림 노인을 끄집어내 불태워 죽였다고도 했다. “살려주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죽이자는 목소리가 더 컸습니다. 그의 죄요? 무슬림이라는 가장 큰 죄악이었죠”라고 라가는 말했다.

힌두들이 무슬림을 비난할 때 쓰는 전형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인도와 타키스탄이 크리켓 시합을 할 때 무슬림은 파키스탄을 응원한다.’ ‘무슬림은 집에서 파키스탄 P-TV를 본다’. ‘무슬림 남자는 무슬림 민법에 의해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어 아이도 10~12명 낳는다. 힌두보다 훨씬 자녀 수가 많다. 아이를 많이 나아 힌두보다 인구 면에서 향후 앞설 수 있다는 생각이다. 힌두 여자를 납치해 부인으로 강제로 삼기도 한다.’

무슬림들은 힌두들의 학살 만행 3개월 뒤 터진 보복 폭탄 테러에 갈채를 보낸다. “힌두들은 우리(무슬림)를 저주하고, 열차에 탄 무슬림 여자들이 머리에 두른 부르카를 벗기곤 했습니다. 폭탄 폭발이 없었으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맥시멈 시티’ 50쪽). 다웃 이브라힘의 폭탄 테러 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무슬림 청년들은 대거 조직 폭력단에 가입했다. ‘블랙 아이’는 다웃 이브라힘 폭력단의 핵심 단원. 프라틱샤 나가르 동네에 사는 그는 힌두 폭도들이 집에 들이닥쳐 아버지가 심하게 구타당했다. ‘블랙아이’는  “힌두들의 폭동이 끝난 뒤 동네의 친구들 대부분이 다웃의 갱단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경찰은 힌두 편이다. 미국 경찰이 흑인을 바라보듯, 인도 경찰은 같은 시선으로 무슬림을 바라본다. 인도에선 무슬림이 힌두보다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고 보기보다는, 경찰이 무슬림을 힌두보다 엄중하게 처벌한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2006년 11월 17일 라딘데르 사차르(Rajinder Sachar) 위원회는 인도 내 무슬림 실태를 조사, 발표했다. 위원회는 만모한 싱 총리 정부가 임명했다. 사차르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뭄바이가 주도인 마하라쉬트라 주는 무슬림 인구 비율이 전체의 10.6%인데, 재소자 중 무슬림 비율은 32.4%이었다. 특히 1년 미만 수형자중 무슬림이 40.6%였다. 사차르 위원회는 이는 무슬림이 경범죄를 많이 범하거나, 경찰이 무슬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사법 집행을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92,1993년 폭동은 뭄바이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며 살던 양대 종교 집단은 이후 각자 만날 수 없는 길로 갔다. 빈민가에서 큰 길로까지 나온 종교 갈등이란 괴물은 뭄바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2008년 11월 동시 다발 테러가 타지 마할 호텔 등에서 발생하자, 뉴스위크 국제판 편집장 파리드 자카리아(Zakaria) 등 많은 이들이 15년 전 뭄바이 종교 갈등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다웃 이브라힘은 1993년 테러 이후 해외로 도주했다. 인도 정부의 현상 수배 명단의 제일 위에 올라있다. 이브라힘은 지금 파키스탄에 은신하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인도 정부는 1일 파키스탄측에 다웃 이브라힘 등 20명의 파키스탄에 숨어 있는 수배범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다웃 이브라힘 보다 뭄바이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없으며, 이번 테러사건에 그가 협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도 수사 당국은 보고 있다고 인도 신문 타임스 오브 인디아는 2일 보도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