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실장

경제 전문가들끼리 쓰는 용어 중 이번 경제위기의 특징을 설명하는 단어 두 개가 있다.

먼저 '시스템 리스크(system risk)'다. '체제 위험'으로 직역(直譯)될 만하지만 실은 금융 시스템이나 무역 방식이 통째로 흔들린다는 뜻이다. 잔가지가 부러지는 수준이 아니라, 기둥이 무너지고 뿌리가 뽑히며 자칫 폐허로 변할지 모를 위기라는 얘기다.

충격파가 큰 만큼 시스템을 지키는 근본 처방이 절실하다는 게 전문가들 판단이다. 대통령이 금리를 내리라고 호통쳐봤자 효험이 없고, 장관이 은행장을 사기꾼으로 몰아도 통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정부의 처방은 병든 몸의 뼈대를 교정해야 할 때 성형 수술에 집착하다 부작용을 키워가는 꼴이다. 금리 인하 지시 후 시장 금리는 오르고 주가와 환율은 더 요동치지 않는가.

지난 10년 새 일본에서는 금융위기를 거쳐 11개 도시은행(상업은행)이 3개로 통합됐다. 한국에서는 5개 옛 시중은행이 모두 간판을 내렸다. 대지진을 체험했던 금융계는 세계 금융의 큰 틀이 바뀌는 대폭발에 다시 마음 졸이고 있다. 이런 판에 권력자의 강압적 태도가 먹히겠는가. '청와대가 뭘 몰라도 너무 몰라'라는 핀잔은 그래서 시장에 널리 퍼졌다.

또 다른 표현에는 '너무 얽히고 설켜 있어 쉽게 죽을 수 없다(too interconnected to fail)'가 있다. 굳이 번역하면 '연계불사'(連繫不死)쯤이다. 종전에는 대마불사(大馬不死·too big to fail)가 기업 사활의 어떤 기준처럼 통용됐으나, 지금은 거래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함부로 사생결단 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 업종이다. 자동차 사려는 고객이 줄어들어 어렵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동차 할부금융회사의 부실이다. GM 등 자동차 메이커들은 할부금융회사의 경영 실패로 할부금을 대출하지 못하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소비 위축에 금융마저 따라주지 못하므로 금융불황과 실물불황이 겹친 혼합형 불황이자, 쌍끌이 불황이다. 국내 자동차 할부 회사들도 똑같이 자금난을 겪는 처지다. 할부 금융회사가 무너지면 메이커까지 덩달아 무너지는 연쇄 붕괴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계열사의 어음 한 장이 부도나면 세계적인 기업들도 쉽게 줄도산하는 것이 이번 경제 위기의 핵심 구조다. 베어스턴스도 산하 헤지펀드 도산이 본사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부실기업을 정리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썩은 부위를 과감하게 도려내되, 수술 방식은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건설업체들에 씨알도 안 먹히는 협약에 가입하라고 공개 압박을 가하고 있다. 마치 도살장에 끌고 가 집단 처형식이라도 거행할 분위기다.

썩은 기업을 먼저 골라내지 않은 채 '구제금융 받을 회사는 손들어!'라고 하면 '죽고 싶으면 앞줄로 나와!'라는 말과 똑같다. 이러면 구조조정도 제대로 안되고 그저 연쇄 폭발의 굉음만 커질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장관은 "지금은 안전벨트를 맬 때이지 뛰어내릴 때는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정부의 대응을 보노라면 많은 국민이 낡아빠진 낙하산을 메고서라도 일단 뛰어내리고 싶을지 모른다.

식당에서 오가는 대화의 색깔과 농도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 일본도 어려운데 우린들 어쩌랴'고 한숨과 체념으로 인내하던 대화가, 어느덧 '경제 살리겠다더니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라는 투의 분노와 격앙으로 변했다. 거기에 독한 욕설까지 섞인다.

이는 단지 펀드가 반 토막 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장과 동떨어진 대통령의 발언, 먹히지 않는 경제팀의 정책 아이디어를 보면서 과연 이 정권이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11년 전 이맘때 어느 대통령은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구걸하면서 '대통령을 속이고…'라고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미루며 경제 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을 경질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몇 번을 보고해도 대통령이 잘 알아듣지 못해서…'라고 답답한 심경을 피력했다.

지금 대통령과 경제팀 사이에는 어떤 진솔한 대화가 오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단지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있다. 대통령의 입에서 "내가 속았다"라는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제2의 외환위기가 온 국민을 검은 폐허의 길바닥으로 내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