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실장

월스트리트의 뉴욕 연방준비은행(FRB) 앞길에선 때마침 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참혹한 처지에 빠진 미국 금융가(街)가 '전면 보수 중' 팻말을 내건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코너를 돌면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증권거래소의 엄중한 경비에 놀랄 수밖에 없다. 최고 권력자가 일하는 백악관 주변에서도 이런 비상 경계를 구경하기란 좀체 힘들다.

거래소 주변 도로는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됐고, 길 모퉁이마다 검문소에다 경찰 기동대까지 배치됐다. 초대형 성조기 앞에서는 회사가 망하고도 고액 연봉을 챙긴 증권회사 경영진의 탐욕을 비웃는 3인 시위대가 보인다.

돈 잃은 투자자들의 분노가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는 증거는 바로 길 건너편에 있다. J P 모간의 본거지 빌딩이다.

이 석조 빌딩에는 88년 전 폭탄 테러로 38명이 죽고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를 포함한 300여명이 부상했던 사건의 파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범인은 잡지 못했으나 주가 폭락과 불황 속에서 당시 대중의 공포 심리가 '묻지마' 테러사건을 양산해냈다.

월스트리트 입구 트리니티교회는 벌써 '불황(不況)모드'로 전환했다. 이 교회는 10월에만 고객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특별 강론을 네 번 열었고, 전용 상담 전화를 개설했다. 새 직장을 찾는 신자를 위한 전직 상담도 세 번 가졌다.

대부분의 금융 회사들은 연방준비은행의 '일일 자금관리' 체제에 편입된 상태다. FRB는 은행 부도를 막기 위해 금고 문을 사실상 24시간 열어두었다고 봐도 된다.

소문이라도 나면 예금 인출사태가 벌어질까봐 비밀리에 긴급 구제금융을 제공해주고, 은행들이 잠깐 맡기는 돈에도 이자를 지불한다. 중앙은행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다던 예외적인 비상 조치가 잇달아 내려지고 있다.

"2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은행이 오죽 급했으면 한국의 최고 브랜드 회사에 수출 금융을 중단했겠어요. 매일 밤마다 벌어지는 현금 확보(오버 나이트 자금) 전쟁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느 대형 투자회사 대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금융회사가 망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때쯤이면 맨해튼에 2009년형 모델이 쏟아질 계절이건만 가장 번화한 5번가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도 신형 딜럭스 승용차를 만나기란 좀체 어렵다. 그 대신 위스콘신의 GM공장이 90년 만에 올 12월 폐쇄된다는 신문 제목이 가판대에서 눈에 뜨인다.

미시간주 100개 학교는 등록금을 대출해줄 돈이 허공에 사라졌다며 손을 들었다. 주택값이 폭락한 몇 지역에서는 파산법원에 경매에 부칠 물건이 몰려 아예 접수조차 받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떼돈 벌었던 월스트리트를 공격하느라 현장의 비명 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몰락하는 '타짜 군상(群像)'을 향해 "이참에 혼 좀 나야 돼!"라며 침 뱉는 식이다.

그렇지만 미국 경제에서 금융업은 국민총생산(GDP)의 3할을 차지하는 선도(先導)산업이다. 사정이 어렵다고 대들보 업종의 회사와 인재를 역적(逆賊) 취급하는 분위기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더구나 미국 금융회사들은 지구상의 여유 자금을 끌어들인 후 중국인도를 전 세계에 값싼 생필품을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탈바꿈시키는 자금줄 역할을 맡아온 공적이 있지 않은가.

지난달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진 이후 미국과 세계는 참담한 비극(悲劇)의 클라이맥스 국면에 동반 진입해 버렸다. "예고편이 끝나고 진짜 잔혹한 필름이 이제야 돌기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다.

금융 혼란은 적어도 1년쯤 더, 경기 침체는 2~3년쯤 더 갈 것이라는 데 이곳 전문가들은 별 다른 이견이 없다.

다만 희미한 불빛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금융위기 때마다 활약했던 당파(黨派)를 넘어선 비상대책 팀(Working group)이 미국 정부 내에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면 여유 달러를 보유한 국가들과의 대타협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라크 침공 이후 오일 머니를 빼간 중동 국가들과 올 들어 슬금슬금 엔캐리 자금을 빼돌린 일본과의 재결합이 핵심 과업으로 부각되고 있다.

수천억씩 달러를 찍어내는 금융대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정치'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신뢰 등급을 올림으로써 이곳에 달러가 다시 몰리는 전기를 만들겠다는 움직임이다.

이라크전쟁 이래 독불장군식 외교로 인심을 잃어버린 부시의 시대, 보수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