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 이듬해인 1988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지 20년9개월 만이다.

20년 숙원을 푼 북한은 곧 북핵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미국과 합의한 핵시설 검증계획서를 내고 6자회담 참가국들의 추인(追認)을 거쳐 지난 8월 이후 중단했던 핵시설 불능화작업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3개월 넘게 정상 궤도를 벗어났던 북핵 협상은 일단 원래의 레일 위로 돌아오게 된다.

북한은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핵시설 불능화 중단, 원상 복구 카드를 내밀며 사태를 악화시켜 왔다. 이런 움직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과 겹치면서 핵 보유를 주장해온 북한 군부가 대외 정책 결정의 주도권을 쥔 것 아니냐는 불안까지 불러일으켰다.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지게 되더라도 마약과 위조 지폐 제조·유통, 대량살상무기 확산 관여에 따른 통상(通商) 제한 조치 등이 남아 있어 당장 실질적 혜택을 누리기는 어렵다. 국제 금융의 도움을 요청하고 미국산 물품의 수입 폭을 넓힐 수 있는 숨통을 열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6월 북한의 핵 신고부터 지금까지 이뤄진 미·북 협상은 매우 좋지 않은 선례(先例)를 남겼다. 당초 미국은 북한이 신고한 핵시설만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곳을 점검할 수 있는 '국제 기준에 맞는 검증'을 주장해왔다. 그 동안 나왔던 6자회담 합의문들에도 그런 내용이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이번 합의는 북한이 신고한 시설에만 검증을 하도록 하고 미(未)신고 시설은 북한의 추가적·개별적 동의를 얻어야만 검증할 수 있도록 했다.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말 외교적 업적에 급급하지 않고는 나오기 어려운 원칙 없는 양보다.

북한 외무성은 12일 "검증에 협력한다"고 했지만 이는 신고 시설에 대해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북한이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에 쉽게 동의할 리가 없다. 우리 외교부도 "북측 입장을 감안해 일부 표현이 '간접적'이거나 '압축적'"이라고 말했다.

여럿이서 합의해놓고 혼자만 다른 해석을 하는 데에서 북한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그런 북한한테 사실을 사실대로 적시(摘示)하지 못하고 '간접적' '압축적'으로 에둘러 표현하고 말았다. 앞으로 합의의 구체화 과정에서 또 한 번 소동이 일 게 뻔하다. 더구나 북한의 전형적 떼쓰기 전술이 이번에도 먹혔으니 북한이 언제 그 억지 카드를 다시 뽑고 발을 뻗을지 모를 일이다. 파국은 면했다지만 북핵 협상은 숱한 고비들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한국과 미국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이행사항을 점검하면서 불능화를 거쳐 핵 폐기까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합의문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할 전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