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수 특파원의 방콕 편지」

최근 국내에도 간간히 보도된 ‘태국의 반정부 시위 사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최근의 태국 상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뜨거운 방콕의 반정부 시위

8월 말부터 지난 10일까지 태국 수도 방콕에 다녀왔습니다. 방콕의 거리는 9월인데도 뜨겁더군요.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인지 낮 기온은 33~35도까지 올라가 푹푹 찌고, 최저 기온은 25~27도에서 내려가지 않는 ‘열대야’가 계속됐습니다. 이런 무더위 속에 한낮에는 거의 매일 스콜(열대성 소나기)이 쏟아져 바닥이 진흙탕으로 변해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태국의 총리 공관 앞마당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공관 뒤로 정부 청사 단지를 품은 가로·세로 1~2㎞ 가량의 안쪽 구역은 반정부 시위대가 점령한 ‘해방구’ 입니다. 반정부 시위대는 지난 8월 26일 이곳에서 일하던 자기 나라의 총리와 공무원 3000명을 몰아내고 보름 넘게 불법점거하고 있습니다. 한 교민은 “서울과 비교한다면 청와대와 정부중앙청사, 외교부 청사 등이 한꺼번에 시위대에 점령당하고 그 안의 공무원들은 모두 쫓겨난 것과 같다”고 설명하더군요.

해방구 안 10여 곳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임시 화장실 부스가 서너 개에서 많게는 20여 개씩 줄지어 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시위대 수천 명, 때로는 수만 명이 벌써 열흘 넘게 임시 화장실을 이용하니 그 부근에선 악취가 진동합니다. 그 냄새 속에서 남녀 시위자들은 어른 크기의 불투명 칸막이 안에서 샤워를 하기도 합니다. 태국 언론들은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생리현상과 관련한 ‘위생문제’가 커지고 있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는 느긋한 것 같습니다. 사막(Samak) 순다라벳 총리는 태국군 최고사령부, 공무원 3000여명은 청사 인근의 국정홍보처 건물 등에 임시 사무실을 내는 등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더니, 점거 농성이 보름을 넘어서자 ‘돈 므엉’ 공항에 임시 청사를 마련해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점거 농성이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농성이 끝나더라도 부서진 집기를 고치고 사무실을 정상 가동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시 청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왕당파와 탁신파의 싸움

국민민주연대(PAD) 중심의 반정부 시위대는 작년 12월 23일 총선을 통해 선출된 사막 순다라벳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5월25일부터 시작해 16주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부청사 점거 농성은 8월 26일 이후 보름이 넘었습니다.

도대체 왜,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이런 생고생을 하는 것일까요. 선거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현지 사람들 얘기를 종합하면 이 싸움은 왕당파와 탁신파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를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2001년 6월6일 = 탁신 설립 타이락타이(TRT) 총선 압승…탁신, 총리 취임

2005년 2월6일 = TRT 재집권

2006년 2월24일 = 탁신 일가 탈세의혹으로 반정부시위 격화

2006년  4월2일 = 민주당의 선거 거부 속 조기총선 실시…TRT 압승

2006년  5월8일 = 헌법재판소, ‘4.2 총선’ 무효 및 재선거 판결

2006년  9월19일 = 군부 쿠데타 발생, 탁신 총리 축출

2007년 5월30일 = 헌재, TRT 등 4개 정당 해체 판결

2007년 8월14일 = 대법원, 탁신 부부 체포영장 발부

2007년 8월19일 = 신헌법 국민투표 통과

2007년 12월23일 = 탁신계 신당 국민의힘(PPP) 총선 승리

2008년 1월19일 = PPP 중심 연정 구성 발표

2008년 1월28일 = 탁신계 사막 순다라벳 총리 선임

2008년 2월28일 = 탁신 귀국

2008년 5월25일 = PAD 반정부 시위 시작

2008년 7월31일 = 탁신 부인 포자만 여사, 세금 포탈죄로 징역 3년형

2008년 8월11일 = 탁신 부부 영국으로 도피, 망명 신청

2008년 8월26일 = PAD 시위대 정부청사 난입

2008년 8월29일 = 푸껫과 핫야이 등 지방공항 3곳 점거농성-폐쇄

2008년 9월2일 = 찬·반 정부 시위대 충돌로 1명 사망, 45명 부상…비상사태 선포

2008년 9월9일 = 헌법재판소, 사막 총리 및 내각 직위 박탈

2008년  9월17일 = 의회, 새 총리 선출 예정

정부 청사를 점거하면서 반정부 시위를 지휘중인 PAD 지도부는 공공연히 푸미폰 국왕을 지지한다고 누차 밝혔습니다. 우선 PAD 회원들은 노란 옷을 입고 있습니다. 태국은 요일마다 색깔이 정해져 있고, 푸미폰 국왕은 노랑색인 월요일에 탄생해서 노랑색은 현재의 태국 국왕을 상징하면서 노란 옷을 입는 것은 국왕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PAD는 주로 보수층과 남부지역이 지지기반입니다. 43개 공공부문 노조도 PAD 지지세력입니다. 이들이 남부의 푸껫 공항 등 3개 공항을 점거하고 열차와 버스, 항만을 부분적으로 스톱시켰습니다.

반면 탁신 전 총리는 푸미폰 국왕과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탁신이 총리일 때에 “입헌 군주제와 왕정(王政)을 종식해야 한다”고 국왕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골적으로 이런 반기를 든 것은 아니고, 한 대학교에서 공청회를 할 때 어느 발표자가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데도 그 자리에서 있던 탁신 총리가 제지를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하는 모습이 반복해 보도되면서 탁신도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란 인식이 확산됐다고 합니다. 이후 탁신의 세력들까지 왕정반대파로 인식되게 됩니다. 지난 9일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총리직을 박탈당한 사막은 물론, 사막과 함께 직위를 잃게 된 내각의 많은 장관들 또한 탁신의 후계자들입니다. 집권 ‘국민의 힘’(PPP) 소속 고위층도 탁신과 직·간접으로 얽혀 있습니다. PPP는 주로 태국 북부 지역과 서민층이 지지기반 입니다.

지난 9일 사막 총리의 총리직 상실 이후 어떤 이가 총리 후보로 거론되면 ‘그가 탁신의 끄나풀이네 아니네’하는 문제로 PPP와 PAD가 설전을 벌이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PPP 중심의 탁신파와 PAD 중심의 왕당파들이 힘 겨루기를 하면서 태국 정가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 부자 왕

달리 보면 세계 최고의 부자(富者) 국왕과 세계 최고 부자인 전 총리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바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탁신(Thaksin) 친나왓 전 총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세계 최고 부자왕’ 입니다. 경제 격주간지 가 지난 8월20일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족’ 리스트에서 푸미폰 국왕은 순재산 350억 달러(약 37조원)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석유의 힘’을 보여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셰이크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히얀 국왕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국왕이 각각 230억 달러와 210억 달러로 그 뒤를 이었지만 푸미폰 국왕의 재산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푸미폰 국왕은 왕실재산관리국을 통해 수도 방콕의 땅 3493에이커(약 140만㎡)를 소유하고 있고, 상장업체인 시암 시멘트와 시암 커머셜 뱅크 지분도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보험사 데베스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도 했답니다.

태국 사람들은 이런 국왕을 질투하거나 모함하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 존경을 표시합니다. 이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한국의 국가보안법보다 무서운 ‘왕실모독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타이 형법 112조는 “왕과 왕비, 왕실의 후계자 또는 왕실을 비방·모독하거나 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조항이 무서워 국왕을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그런 법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왕을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푸미폰 국왕이 스무살에 왕위에 오를 때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왕이 된 뒤에는 방콕에 머물지 않고 지방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사는 국민들을 위로했답니다. 마약을 키우던 농민들에게 커피를 재배해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면서 판매를 알선해주기도 했답니다. 왕의 인기가 점점 올라가면서 그가 시멘트 회사를 세우면 다른 업자들은 “왕이 하는 거니까”라면서 포기해 시멘트 회사가 독점 회사가 되고, 왕이 은행을 세우면 많은 태국 국민들이 그 은행을 이용해 ‘존경하는 우리 왕이 돈을 많이 벌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 부자 전직 총리

방콕의 영자 신문 ‘더 네이션’의 카비(Kavi) 총키따보른 편집부국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탁신 전 총리를 빼면 현재의 반정부 시위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탁신 전 총리 때문에 사막 총리나 PPP(국민의 힘)가 ‘완전한 정당성’(full legitimacy)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탁신 부부의 현재 재산도 푸미폰 국왕에는 못 미치지만 엄청납니다. 태국 검찰은 지난달 25일 법정 출두 명령을 어기고 영국으로 도피한 탁신 전 총리 가족의 재산 760억 바트(22억 달러)에 대한 압류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22억 달러면 한국 돈으로 2조3000억원 이상입니다. 이 정도 재산이면 선출직 총리 가운데 세계 최고 부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습니다. 태국 검찰은 “탁신이 총리 재직(2001~2006) 시절 부정 축재했다고 판단해 자산조사위원회(AEC)의 명령에 따라 동결된 금융자산 등 760억 바트를 압류하기 위해 대법원에 소송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이번 시위는 지난 7월31일 탁신 전 총리의 부인과 처남이 5억4600만 바트(약 180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에 유죄가 선고됐는데도 이미 해외로 도피해 감옥행(行)을 피하면서 격화됐습니다. 태국 검찰은 기업가(CEO) 출신인 탁신 전 총리가 자신과 관련 있는 회사에 수조원대의 불법 대출을 해 주고, 복권당첨 방식 변경과 관련한 3780억 바트(약 12조원)의 예산을 낭비하고, 신공항 건설 발주 비리, 폭발물 탐지기 구매 비리, 직권남용과 부정축재 등 10여 건의 비리를 저지른 혐의에 대해 수사해왔습니다.

그런 탁신 부부가 영국으로 도피하자 사막 현 총리는 “나는 탁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한통속인 사막이 탁신 일가의 도피를 방조했다고 반정부 시위대가 믿는 이유입니다.

반정부 시위대는 탁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친인척, 그를 가까이서 보좌하던 사막 총리나 PPP의 많은 구성원들까지 ‘부패집단’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푸미폰 국왕의 뜻대로 정리될 것

자끄리왕조의 라마 9세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스무 살이 되던 1946년 국왕에 즉위한 후 62년째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올해 12월 5일이 81세 생일날입니다. 현재 세계 최장기 집권 중입니다. 처음엔 힘이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당시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된 뒤 본격적으로 군부독재 시대를 개막한 피분 세력이 우민정치의 도구로 데려온 허수아비 왕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주로 유럽에서 살다 방콕으로 돌아온 푸미폰은 군부와 손을 잡고 무너진 왕궁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62년을 집권하는 동안 푸미폰은 19번의 쿠데타와 16번의 헌법 개정, 20여명의 총리 교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화폐에서부터 집집마다 걸려 있는 달력, 도로 곳곳에 설치된 광고판 등에는 온통 푸미폰 국왕의 사진이 넘쳐날 정도로 대부분의 국민들로부터 ‘살아있는 신’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태국 국왕은 국정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푸미폰 국왕이 가진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태국은 일본이나 영국처럼 입헌 왕정 국가(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이지만 국왕의 발언권이 대단해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국왕이 인정하지 않으면 망명을 하거나 군대를 복귀시킬 정도로 막강합니다.

그런데도 푸미폰 국왕은 엄청난 자제력으로 현실 정치에는 좀처럼 개입하지 않습니다. 1973년 쿠데타 때 군부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던 대학생들이 쫓기자 왕실로 불러 들여 보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 집권 세력을 바꿉니다. 1992년 수친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부적절하다”고 밝혀 수친다의 총리 사임과 해외 망명을 이끌어 냅니다. 2006년 9월 탁신의 몰락을 이끈 군부 쿠데타 때에도 암묵적으로 군부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 현실 정치에 눈에 띄게 관여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번 반정부 시위 사태도 결국은 국왕의 의중에 따라 결말이 달라질 것으로 방콕 현지 사람들은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왕의 선택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먼저 PPP쪽은 탁신과 그 추종세력들의 부패 연루 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 작년 12월23일의 선거부정 혐의가 속속 확인돼 PPP연정의 해체를 선관위가 헌법재판소에 요청한 상태입니다.

PAD쪽도 잘못이 있습니다. 외견상으로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23일 선거로 당선된 사막 순다라벳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둘째로 PAD 시위대는 총리공관과 정부청사를 점거해서 3000여 공무원들을 몰아내는 등 공무집행방해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푸껫, 핫야이 등 국제공항 3곳을 폐쇄시켜 태국 정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을 묶어 놓는 테러에 가까운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우리 정부가 지난 2일 방콕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직후 여행자제 지역으로 선언한 것도 바로 공항 폐쇄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하원 480명 중 70%는 임명직으로, 30%는 선출직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등 현재보다 민주주의를 퇴보시키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태국 사태가 어떻게 정리될 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