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태조 26년(943)조는 왕건이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전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싣고 있는데, 태조는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삼한을 통일했다(統一三韓)'라고 말했다. 삼한(三韓)에 대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라고 설명해왔지만 태조 왕건을 비롯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 전부를 뜻했다. '삼국사기' 최치원(崔致遠) 열전에 따르면, 최치원은 당(唐)나라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편지를 보내, "동해 밖에 세 나라 마한·변한·진한이 있는데,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며,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병(强兵)이 백만이나 되어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幽燕), 제로(齊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큰 해독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에 따르면 오월(吳越)은 현재의 중국 양자강 남쪽 지역, 유연은 북경과 천진 지역, 제로는 산동성 지역을 뜻한다.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당 희종(僖宗)에게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은 그가 이를 확고한 사실로 믿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의 정사인 '요사(遼史)' 지리지 삼한현(三韓縣)조는, "진한은 부여이고, 변한은 신라이며, 마한은 고구려다(辰韓·扶餘, 弁韓·新羅, 馬韓·高麗)"라고 마찬가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한 후 삼한 구강(舊疆) 수복의 의지를 보였다. 광무 7년(1903) 이범윤(李範允)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의 영유권을 획득하려 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망명정부의 명칭이었던 대한(大韓)민국 임시정부나 광복 후 건국한 대한(大韓)민국이란 명칭에는 이런 건국정신이 담겨 있다. '대~한민국'이란 구호 속에 이런 큰 뜻이 담겼음을 인지한다면 건국 60년을 맞는 오늘 이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절로 보일 것이다.